GO THROUGH <AND THEN>
2018년 7월 6일(금) ~ 2018년 7월 29일(일)
■ 전시 안내
○ 전 시 명: Go through <and then>展
○ 전시기간: 2018년 7월 6일(금) ~ 2018년 7월 29일(일)
○ 참여작가: 서해근, 김진기, 허수영, 안경진, 윤성필, 이희명, 임장환,
김혜나, 이샛별, 구지윤, 윤예제, 정지연, 이채영, 조성현
■ 세미나 및 오프닝 행사 안내
○ 일자: 2018년 7월 6일(금)
○ 세미나 일정
- 15:00~15:50 / 서진수(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미술시장연구소 소장)
- 16:00~16:50 / 최두수(유니온 아트페어 총감독, 작가)
○ 오프닝 일정
- 17:00 ~
■ 전시 소개
Go through 展은 세대가 다른 작가들의 서로의 관점에서 지나간 세대와 동시대 미술세계를
존중하고 격려하며 이해하는 장을 마련코자 합니다.
1부는 <and then 2018.7.6 ~ 7.29> 자하미술관의 신진작가 공모 ZAHARTIST에 선정된 작가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전시이며, 이어 <백수지년 2018. 9. 28 ~ 10.21> 100세를 바라보는 원로화가들의 풍부한 경험과 후배들에게 귀감되는 식지 않는 예술열정을 전시로 준비합니다.
신진의 보호막을 치워버린 작가들을 다시 보다.
■ 김최은영(미학, 경희대 겸임교수)
어쩌면 운이 좋았던 것은 우리였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
신진작가가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미술계다. 유행에 민감한 한국의 현대미술계는 더욱 그렇다. 수많은 공모전은 그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국공립과 사립미술관, 화랑과 대안공간을 막론하고 그 수와 양은 생각보다 많다. 그렇게 선발된 신진 작가들. 그 많던 신진 작가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무책임한 미술계의 관행 속에서 신진이란 이름의 젊은 작가들은 끊임없이 소비된다. 발탁된 후의 보장 따윈 전혀 없는 첫 번째 개인전을 장렬하게 치러내고 등용된 이들은 실상은 생각보다 초라하다. 또래 작가들의 약간의 시기와 격려, 막연한 희망고문의 첫 계단으로 올라섰을 뿐 여전히 방향 지시판도 미래를 약속하는 꿈의 갤러리도 등장하진 않는다.
필자 역시 자하미술관 근무 당시 이와 같은 무책임한 일을 벌였고,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잊었던, 혹은 오가며 만나던 작가들을 다시 볼 기회를 얻었다. 그때의 작가가 활발한 미술계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놀라운 확률이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이제 신진이란 타이틀이 머쓱해진 허수영 작가를 만난 2008년으로 돌아가 보자. 대학원 실기실에서 만난 작가는 펼쳐놓은 그림 보다 더 많은 것들을 꾸역꾸역 끄집어냈다. 긴장과 기대감 사이의 동작과 시선으로 분주한 작품 설명이 이어졌다. 신진이란 낱말에 알맞은 날 것의 솔직함과 노동집약으로 무장된 열심의 화면들을 마주하며 솔직히 ‘대단한’이란 단어를 떠올리진 않았었다. 다만, ‘되겠다.’라는 촉이 감지됐다. 도감류의 책들에서 채집한 식물과 동물들이 화면에 가득한 작품들은 아직 작가의 생각이 오롯이 도출된 느낌보다는 시도-하고 싶은 말을 어떤 목소리와 어떤 톤으로 해야 하는지, 이렇게도 읽어보고, 저렇게도 읽어보는-로 읽혔다. 그 시도들은 완성된 목소리의 톤이 궁금할 정도의 호기심을 끌어냈다. 화면을 이끌어 가는 밀도 있는 구성력과 동어반복 식의 표현 기법에도 불구하고 비울 곳을 찾아낸 현명한 감각은 이미지 과잉이 화면에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흑백조의 톤조절과 풀컬러의 형태조절 능력을 통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 DNA를 내포하고 있음을 여실히 피력하고 있었다. 더구나 상당한 작업양은 불안전한 작품 세계를 조금 빨리 당겨줄 수 있는 작가의 긍정적 욕망으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오늘 약간 섭섭한 개념과 조금 아쉬운 화면에 내용은 조금 기다리며 지켜보아도 좋다는 판단을 이끌어 냈다.
자하미술관의 신진작가공모 프로그램으로 첫 번째 개인전을 치른 허수영 작가는 “3년 동안 레지던시 프로그램처럼 작업실을 저렴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서울, 인천, 청주, 광주로 이사를 다녔다.” 전형이고 보편적인 미술계 진입방식이다. 그러는 동안 나열의 대상은 동물에서 테디페어로 새나 숲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변화하는 작업환경에 알맞은 그 만의 적합한 나열 대상을 찾아낸다. 숲! 숲은 물고기, 새, 꽃, 벌레와는 다르다. 그 숲에 대한 허수영식 나열은 공간의 숲에 시간의 나열을 입히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허수영은 숲의 시간 나열을 본격화하면 이제 일단계라 부를 수 있는 자신의 오롯한 작품세계의 첫 번째 국면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개인전을 치르는 전시장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판매가 이루어지는 미술시스템 안에 서 있다는 것은 그가 이제 신진이란 수식어 없이도 활동 가능한 ‘작가’로 성장한 반증이다.
김진기 작가 역시 대학 내 있는 갤러리에서 과제전시를 하는 동안 만난 대학원생이었다. 질펀한 회식이 끝난 자리의 지저분한 모습을 ‘다이나믹’이란 표현으로 묘사하는 그는 용감하고 부정적인 화면 속 내용과는 달리 차분하고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내 갤러리였지만 규모가 상당했고 걸린 김진기의 작품 역시 꽤 많았다. ‘모듬 회식’시리즈가 눈길을 끌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후 ‘Trashtopia’라 이름 지은 폐기물처리장의 거친 화면들은 신진작가들에게 찾았던 감수성, 사회적 반응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기성이 되어버린 당시의 필자가 느낄 수 없는 불합리와 모순들을 신진의 눈을 통해 보고자 했던 기대치가 충족된 작품들이었다. 더구나 화면의 구성은 사진과 페인팅이 순서 없이 뒤섞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부딪혀서 불현한 마무리감을 주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작가의 태도가 역시나 ‘신진스럽다’라는 감상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안티주의자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닌 ‘일상’과 ‘개인’에 매몰된 그 당시(혹은 요즘도) 신진들 팀에서 사회와 환경, 이웃과 실존하지만 원치 않는 것들을 목격할 누군가가 찾아냈다는 뜻이다.
김진기 작가는 바로 그 이듬해 OCI미술관에서 지원을 받아 다시 한 번 개인전을 짧은 시간 안에 치러내야 했다. 신진작가에게 운이 좋다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OCI미술관의 신진작가 육성프로그램은 분명 실력과 운이 모두 좋아야 획득할 만한 중요한 인정지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준비기간이 너무 확보되지 못했다는 필자의 개인적인 사견이다. 이유는 이미 대학내 갤러리에서의 과제전에서 폭발적인 다양한 작품을 쏟아 냈었기에 그것들을 다시 재정비하여 키워나갈 부분과 멈출 부분을 분리하고 판단하는 데는 충분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미술계에서 보이지 않았던 김진기 작가가 필자는 내심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만큼의 사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뿐 멈추거나 이탈하지 않았다. 2008년부터 시작된 <오빠> 시리즈들이 보다 분명해지는 있다는 느낌을 받은 작품들이 사진으로 등장한다. 수많은 영화 클리세 중에 ‘통속’에 가까운 장면과 ‘오빠’로 시작하는 자막들은 이후 군산에서 <명화극장>과 <군산 아메리카타운의 캄보디아 언니들> 시리즈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보다 능동적이 되었지만, 시선은 객관을 유지하려 한다. 대상을 사진으로 펼쳐 보이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동정, 연민, 대안 등의 감상적 단어는 빠진 그저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빠>시리즈와 무관하지 않다. 역시 그런 맥락으로 작가는 계속 작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Trashtopia> 시리즈도 역시 개념과 표현이 분명하고 김진기 본연의 개념과 더욱 가까워진 느낌의 사진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내가 플래쉬를 터뜨리자 적목현상으로 화답했다> 작품은 사진콜라쥬다. 음식물 쓰레기와 개와 소. 그 단촐한 등장 대상들은 이전 작품인 <Trashtopia>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분명한 작품이다. 군산의 레지던시의 경험과 그 간의 생각이 정리되지 못한 채 엉켜있었다면 이제 작가의 시각적 습관과 개념의 분명해진 어조가 수면위로 올라오고 있음이 읽혀진다. 김진기 역시 ‘신진’이란 보호장치 없이도 설 수 있는 작가로 성장했음이 분명하다.
10년. 신진으로 발탁(?)한 후 그 동안 작가들은 이렇게 자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자하미술관에서 기획하는 Go through - and then 展은 그러한 성장을 지켜보기 위한 자세로서 그 의미는 특별하다.
신진이란 이름으로 발탁한 작가들의 10년후 모습을 재조명하는 일은 책임 있는 사회적 관으로서 역할이다. 역할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신진이었던 그들은 신진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 이제 미술관, 혹은 필자와 같이 시스템 안의 매개자들이 본연의 역할을 어떻게 좀 더 충실하게 수행해 나갈지 고민할 때다.
서해근은 주로 전투기나 총 등 전쟁무기를 주제로 꾸준히 작품을 제작해오고 있다. 냉전시대가 끝난 현시점에서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강대국들의 무분별한 무기개발 사업들을 보며 이들의 목적이 비단 세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것들이 아니라 무력과 기술, 자본을 토대로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것임에 대해 비판의 눈초리를 보냈고, 이러한 일련의 사업들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에서 빈 껍데기, 즉 허물과 같지 않을까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실체로써 존재하고 있으나 그 목적이 전도된 첨단의 무기들. 평화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삶의 이면에서 은폐하고 있는 것들을 껍데기 혹은 허물을 통해 드러내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호하고 있으며 무엇을 통해 안전을 찾는가에 대한 의미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작가노트)
■ 백숙영(현 아트하다)
2012년, 13년에 진행된 자하미술관의 신진작가 공모에 선정된 작가는 김은영, 김혜나, 노정희, 안경진, 윤성필, 이희명, 임장환 작가로 총 7명이다. 이중 현재까지 작가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는 5명이다.
이희명 작가는 복잡하고 불균형적인 도상들이 가득한 화면을 통해, 연약한 인간으로써 경험한 개인적, 사회적 부정적 시선과 비틀어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잃은 불안정한 자아를 표현하며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을 드러내었다.
현재의 그의 작업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미지의 조합과 출동을 조합하여 방황하는 자화상을 표현하고 있다. 기존의 작품에서 드러났던 무채색과 공허했던 배경과 이미지들 대신 풍만한 식물들이 우거진 숲으로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작가의 홀로 서 있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자연과 죽음과 외로움 앞에 놓인 불완전한 인간과 같이 대비되는 이미지의 조합과 출동을 통해 고독과 연민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임장환 작가는 인간의 욕망과 아이콘을 주제로, 한 화면 가운데에 위치한 인물을 중심으로 신화적 소재와 상징적인 정물들을 배치하는 구조와 더불어 비비드한 컬러의 물감들로 수정 없이 한번의 붓질로만 화면을 채우는 방식으로 서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오브제들의 배치로 묘한 긴장감을 드러냈었다.
현재 작업중인 작품들은 화면을 구성하는 구도는 예전의 바니타스 정물화의 방식을 따르는데, 정물에 가까워진 인물상과 희미해진 정물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서로 경쟁하듯 존재감을 드러내던 오브제들은 그 존재감과 상징성이 모호해지고, 소수의 아이콘만이 의미를 부여 받는다. 화면의 중심이 있는 인물은 꽃이 가득한 정물이 되었고,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멜랑콜리한 블루와 어두운 색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건설된 하나의 사회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나서 다가오는 심리적 압박과 공포감이 무의식적인 꿈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내면의 본질적인 불안을 은유의 꽃으로 드러내고 있다.
김혜나 작가는 자신의 경험한 주관적인 감상을 드로잉 작업에 이어 감상의 대상이 가지는 고유의 감각들을 소재 삼아 그것을 ‘느낀다’는 것에 대한 시작점을 찾기 위한 드로잉을 통해 색과 형태를 최대한 배제한 추상회화를 선보였었다. 현재 그의 작업은 오랫동안 관찰해온 일상의 풍경을 추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처음 선보인 추상작업에 비해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난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묘사가 아닌, 대상에 대한 주관적 감상과 상상을 통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물상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가 선택한 풍경은 외부에서 점차 개인의 공간으로, 자연에서 실내 정물까지 작가 특유의 회화언어로 표현하며 새로운 추상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안경진 작가는 인간의 편견과 기존의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대해 통찰하는 작업들을 진행해 왔다. 작가가 만들어낸 조각에서 일차적으로 보여지는 형상 뒤에 숨겨진 이미지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문제 등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시각을 제시했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은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 무의식과 같은 내면의 본질에 대한 개념을 드러내는 작업 과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 가능한 조각작품과 빛을 통해 한 가지의 실루엣만 재현하는 그림자의 대치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기존의 작업에서 다의적 관점을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였던 그림자는 조각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며, 보여지는 외면에 숨겨진 하나의 진실, 가치를 가시화하며 커다란 존재감을 부여 받는다.
윤성필 작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설치, 조각, 페인팅 등 다양한 방식의 작업을 진행해왔다.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탐구는 현실 너머의 우주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다. 동양사상을 근간으로 한 그의 작업은 현대과학과 조우하였으며, 동서양 사상에서 공통적인 주제인 우주 에너지의 순환구조를 통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스테인레스 선이 규칙적으로 겹쳐진 조형물, 쇠구슬, 동전, 쉿가루 등이 원뿔형 구조물 위에서 계속 순환하는 설치작업, 철가루를 이용해 전자기장의 에너지 흐름을 기록한 평면작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오고 있다.
기존의 작업들이 물질성과 우연성이 두드러진 반면, 현재의 작업에는 작가의 계획한 규칙에 의해 일련의 질서가 정립된 기하학적 형태를 띄며, 세련된 조형미를 보인다.
이번 전시를 위해 만난 작가들에게 느낀 공통적인 부분은 각자의 내공을 쌓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혈기에 오롯이 작업에만 몰두했던 그 당시에 비해, 현재는 현실적인 생활과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밸런스를 맞춰가는 데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예술가로서의 긴 호흡을 하기 위 한 과정으로, 각자의 역량을 통해 좀 더 본질에 가까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듯 하다.
미술계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고민하고 작업했던 그 시기와 6년이 지난 지금 그들과 내가 고민하는 바는 다르지 않다. 날 서있던 예민함과 호기심은 그때보다는 줄었겠지만 평생 예술가가 되기 위해 삶과 작업의 밸런스를 맞춰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음을 느꼈다. 아쉽게도 예술적인 작업을 그만둔 이도 있지만, 그들 나름의 밸런스를 찾기 위한 선택이었을 테니 응원을 보낸다.
■ 유정민(큐레이터)
구지윤
구지윤의 작업은 끊임없이 사회 전면의 모습과 우리 내면의 모습을 탐구하고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공사장이 그 예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마치 습관처럼 부수고 쌓고 다시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현장의 모습은 현 시대가 그러하듯 너무나 일상적인 것과도 같지만 홀연히 쨍 하고 거대한 공포가 되어 우리를 위협한다. 그림 속의 반추상 형태의 공사현장의 모습은 인간 즉 현대인 혹은 작가 자신과 중첩되어 복잡하고 무거운 심리상태가 더욱 극대화기도 한다. 이미지 속의 가득 채워지는 붓 터치들과 층층의 두터움이 더해질수록 점점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회화라는 매체와 추상기법을 이용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작업 안에서 느껴지는 우리의 무수한 심리상태가, 표현되는 매체의 방법과 묘하게도 연결된다. 그래서 꼭 거대한 캔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추상회화로서의 표현들은 구지윤 작가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내면의 심리 혹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예제
윤예제는 끊임없이 자연이라는 배경을 그림 안에 등장시킨다. 그림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러 풍경들을 보면 실제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듯 하지만 마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 3의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늪 속의 작은 웅덩이는 꼭 작가가 꽁꽁 숨겨두었던 나만의 공간을 조심스레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보는 이도 동화되어 그 숨겨진 공간 안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혼란을 야기시킨다. 즉 그림 안의 그 작은 공간은 현실 의 풍경을 넘어서 보다 확대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회색 빛이 도는 그림 속의 색조는 현실을 너머 몽환적이고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작가는 그 애매모호한 영역과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일시적으로 그림 안에 가두어 매우 고요하고도 심리적인 안정감과 일말의 불안함을 마주하게 한다.
이샛별
이샛별의 그림 속에는 빈틈없이 무성한 나무들과 풀들이 과하다 싶을 만큼 화면을 감싸고 있고 그 안에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그마저도 곧 주위 녹색의 것들로부터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가거나 이미 흡수되어버린 냥 전신의 반쯤은 그 자취가 없어진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림 속의 풍경에서는 이렇게 누리고자 하면 내 것이 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의 실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그 색이 바래지고 숨이 다해서 점점 희미해지고 아예 없어져버린다. 그렇게 없어져 버린 형체들은 하나의 녹색 환영으로 더해져서 우리를 위협하고 또 위협한다. 더 이상 아무도 초록의 풀잎색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단편적인 아름다움을 소비하며, 내가 방금 까지 알고 있던 모든 상식과 사실들은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다. 결국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생명들은 모두 거짓이 되고 밀려버린 진짜의 것들은 다시 괴물의 메아리가 되어 우리를 반격한다.
■ 남혜인(큐레이터)
정지연
정지연 작가는 생각하지 못했던 소리를 만들어 낸다. 빛과 소리, 물질 다양한 매체에 투영하여 변주곡을 연주하듯 융합적 구성 방식의 작업을 제작한다. 이번 작품인 <그림자 푸가>는 벽과 모터 틈새 사이에 실들이 감겼다가 다시 풀어지고 유리막대는 조이고 다시 풀어놓는 긴장감을 조성시킨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공산물들은 거울, 오르간 그리고 직기를 연상시키고자 한다. 구리관은 오르간을 유리막대는 직기로 거울은 형태를 표현하며 구체적으로 ‘푸가’로 형상화 시킨다. 네 개의 모터는 사운드의 알고리듬을 변화해가며 주파수, 파장을 만들어 소리음의 실들이 직조되어 다양한 소리를 연주한다. 작가는 인공산물을 통해 인간으로써 지니는 각자의 개성의 소리, 표현력, 분위기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새로운 기술 시대에도 불구하고 기억되어야 할 과거의 추상성과 현재의 호소되는 신체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새로운 조합으로 생성되며 작가는 우리에게 시각, 청각, 감각적으로 궁금증을 만들어 낸다. 푸가의 형상을 한 다양한 금속이 내는 소리는 사람들이 목소리의 높낮이를 추상하게 하며, 그것은 작품이 보여주는 내면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각각의 금속이 내는 소리가 다르듯 우리의 생각도 다르게 표현되고 그 속에서 융합을 이끌어내 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새로움을 창조하며 현실에서 실현되고 소통하고자 한다.
이채영
이채영 작가는 단일한 색을 가진 먹을 소재로 장지 위에 공허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 시킨다. 살짝 바랜듯한 색감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띄며 아련한 추억 속 풍경이 그림을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과하기 쉬운 장소에서 작가만의 독특한 정서의 잔향이 배어 나온다. 딱히 어떤 것을 그렸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친숙한 공간에서 쉽게 지나쳐버리고 포착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담아 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을 동시에 일으키는 분위기를 자아내며 한없이 적막한 것 같다가도 긴장감이 엄습한 묘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은 작가의 내면 심리가 투사되어 보는 이들에게 발길을 머무르게 한다. 작품 속 멈춰진 장면에선 언젠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이 가동될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친숙한 장소는 우리들 기억 속에서 잊혀지기 쉽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장소 마저 특별하게 느껴지듯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장소에서 살아가는 현실임을 작품으로 비춰 준다.
조성현
조성현 작가는 무의미할 수 있는 일상 소리들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발생하는 ‘시간’을 필드레코딩으로 담아낸다. 작가는 폐쇄적인 공간에서의 사운드와 개방적인 공간의 사운드의 경계에 대해 실험하고 일상 속에서 만나는 소리 파장의 흔적을 사운드 스코어로 중첩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운드는 관객의 시간과의 연결시킨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소리들이 누적되면서 작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간과 일상 소리의 관계를 조율을 통해 관객도 흔적을 남기며 작품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간다. 눈에 보이지 않고 형체도 없는 비물질의 흐름인 시간과 소리를 통해 흔적을 만들어 내며 동시에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 질문의 답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며 공간, 시간, 빛, 신체리듬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익숙해서 스쳐 지나간 소리들을 발화되고 관객과 작품은 그렇게 조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