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권의 수평선: 순례자가 자연을 바라보듯이
고동연(미술비평)
”좋은 작품이란 공간이 채워져야만 좋은 그림인가? [하지만] 역으로 절제된 노동행위가 축적된 것이 그림이 된다.“
”울분의 현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선도, 정의도 없는 냉정한 반인륜적인 행위가 일어난다. [그래서] 오롯이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결국 무엇인가? 작품 행위를 통해 되묻고 싶다.“
생태학 교육의 대가이자 생태예술가인 메리 헬가 만테레(Meri-Helga Mantere)는 생태예술과 예술교육의 목적이 환경오염에 대한 실태를 관람객이나 수강생이 깨닫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 그보다 생태예술 교육이 진정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태도와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김일권의 최근 회화에서 두드러진 자연을 접근하는 방법, 특히 순천만을 화폭으로 옮기고 미디어아트 작업을 통하여 끝없는 수평선을 표현하는 작가의 의도 또한 메리 헬가 만테레가 주장하는 생태예술가, 혹은 생태예술 교육가의 자세를 닮아있다.
얼핏 보기에 김일권의 회화는 아름답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거나 찬양하는 작업으로만 인식하기 쉽다. 생태계의 환경파괴와 같은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하기에는 그의 회화 속 자연 풍경이 너무도 평온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화뿐 아니라 비디오, 멀티 미디어설치 작업에 이르는 작가의 다양한 작업활동의 연장선상에서 회화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가 품고 있는 생태계에 대한 고민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가 글을 통해서 표현한 바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일탈의 경로를 걷고 있다면, 김일권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에 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태도를 요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김일권의 작품을 감상할 때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가? 즉 관객은 김일권의 최근 회화로부터 인간과 자연에 관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게 되는가?
수평선과 스크린: 열린 공간과 시간을 향하여
김일권 회화의 중요한 특징인 수평적으로 펼쳐진 구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시, 공간에 걸쳐서 화면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에 김일권의 회화를 영화의 스크린에 비교하고자 한다. 매우 단순하고 절제된 색면으로 이뤄진 회화는 영화의 화면처럼 캔버스를 넘어서서 새로운 경험의 창(窓)을 연다. 하늘과 땅을,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수평선이나 지평선은 옆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광경을 암시한다. 멀리서 아지랑이와 같이 수면 위를 올라오는 자연의 풍경이나 땅의 지축을 멀리서 바라본 풍경은 화면 안에 담길 수 없는 무한대를 의미한다. 영화의 스크린처럼 김일권의 회화는 화면 안에 포함된 부분만큼이나 보여지지 않는 화면 밖의 프레임을 넘어선 세계를 포용한다.
회화를 특정 프레임을 넘어선 펼쳐진 세상으로 인식하는 관점은 서양 미학의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제욱시스 (Zeuxis)와 파라시우스(Parrhasius)의 일화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서구 회화가 내세워온 사실주의 전통을 상기시킨다.2) 나아가서 커텐 이미지의 아티스트리(Artistry)가 너무 탁월해서 그림을 보기 위하여 제육시스가 커텐을 걷히는 대목은 서구의 회화가 결국 화면 밖, 커텐 너머의 펼쳐진 세상을 프레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구 회화가 화면에 담고자 했던 것은 물체가 아닌 2차원의 평면을 넘어선 바깥 세상에 해당한다. 커텐 너머의 세상 말이다. 관객이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서 카메라가 보여주는 프레임 바깥 세상을 계속 상상해야 하듯이 말이다.
김일권 회화의 수평적인 구도 덕택에 관객은 캔버스의 프레임을 극복하고, 화면 바깥을 상상하게 된다. 특히 영화 속 공간으로부터 점차로 주인공을 따라 관객이 물리적, 상징적 공간을 넓혀가듯이. 김일권의 수평선 구도는 관객의 눈과 마음을 천천히 확장시킨다. 특정 시점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수평선을 따라 걸어가면서 말이다. 관람객의 눈은 화면 위를 ‘순례자’와 같이 배회하게 된다. 마음을 비우고 가장 진솔한 형태로 자연과 마주하게 되는 순례자처럼 그의 그림이 지닌 매우 단순한 수평구도는 회화를 화면 내부에서 화면 외부로, 시간을 두고 감상하게 만든다.
여기서 작가에게 시간성은 다양한 차원을 연관된다. 일차적으로 수평선은 작가가 순천만의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의 시점을 의미한다. 작가는 작업의 제목을 자신이 풍경을 바라본 물리적인 시간에 따라 부친다. 연도와 날짜 순서에 따라 제목이 부쳐지는데 흡사 1960년대 온카와라(On Kawara)와 같은 행위예술가들이 작업을 일기와 같이 일상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듯이 순천만을 대하는 자신의 ‘과거-(거기 있었음)’ 시점이 제목이자 일차적인 시간적 배경이 된다.
수평선을 통해서 작가가 암시하고 있는 두 번째 시간성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시간성이다. 원래 수평선은 시간의 영원한 흐름을 상징하여왔다. 종교화에서 초월적인 시간성을 의미하는 십자가 사건이 주로 수직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반하여 수평적인 구도는 연속성을 의미한다. 작가는 수평선을 전체 화면에서 황금비율에 따라 정한다. 이때 수평선은 보평적인 조형 요소로서 의미를 지닌다. 연장선상에서 시간성은 더 이상 특정 장소와 작가의 관점을 넘어선 영원하고 영속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관객의 시점에서 시간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회화에서 수평선은 전체 화면에서 작품마다 위치를 달리한다. 수평선이 가늘게 그려진 경우 멀리서 바라본 풍경을, 수평선이 넓고 굵게 펼쳐져서 아래쪽에 그어진 경우 작가나 관객이 자연 풍경 속에 거의 들어가 있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수평선의 위치에 따라 관객은 회화 속 풍경과 다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의 미디어 작업을 통해서 더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시점의 변화는 작가나 관객의 입장에서 자연과 자신의 신체적 관계에 따른 가변적인 시, 공간성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을 거니는 순례자가 다양한 시, 공간의 접점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 속에서 거닐 듯이 말이다.
따라서 김일권의 회화는 공간의 무한한 확장성과 함께 관객이 가변적인 시간성을 경험하게 만든다. 수평선의 다양한 위치에 따라 관객은 여러 시, 공간에 걸쳐서 자신의 신체와 자연 풍경과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덧붙여서 불명확하게 그어진 수평선은 하늘과 물이 만나는 순간을 암시하는데 밑 색과 덧칠한 색이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화면의 표면 위에 떨림을 만들어낸다. 특히 하늘과 물의 경계를 가르는 수평선은 배경의 풍경과 만나면서 서로를 덮고 감싸고 지우면서 미묘한 자연의 떨림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떨림을 시시각각으로 감지하려는 관객에게 비로소 수평선은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순례자를 위한 ‘순천만’ 생태미술
작가는 회화 이외에 미디어아티스트로도 활동해 왔으며, 최근에는 최근 생태예술과 연관된 미디어아트 설치 작업도 전시하였다. 그가 영감을 얻고 있는 순천만의 풍경은 아름다운 자연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을 감상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작가가 주장하는 ”탐욕과 욕심에 의한 세상 작태들 시대가 만들어낸 아픔“은 결국 그가 경험한, 그의 고향을 통해서 드러난 자연의 아픔을 의미한다. 생태적인 이슈는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울분의 현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선도, 정의도 없는 냉정한 반인륜적인 행위가 있다.“ ”오롯이 우리들이 추구하는가치가 결국 무엇인가 작품 행위“를 통해 나타나기를 작가는 희망한다.
김일권은 현재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룹전에서 순천만의 풍경을 레포타쥬와 같은 방식으로 기록하고 화선지에 배가 떠 있는 순천만의 풍경을 전시하였다. 순천만의 수평선 이미지가 찍힌 한지를 벽면을 따라 설치하였다. 관객은 벽을 따라 걸으면서 작업을 관람하게 된다. 풍경은 순천만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관객은 수평으로 뻗은 순천만의 펼쳐진 풍경을 한지 설치를 따라 순례하듯이 경험하게 된다.
물론 미디어아트나 드로잉 설치가 회화와 동일한 경험을 유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회화는 관객이 일반 회화와 같이 중심에 서서 관찰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일권의 회화에서 순천만은 시간을 들여 자연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순례자의 자세를 요한다는 점에서, 최근 그의 미디어 설치 작업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가 비판한 바와 같이 김일권의 최근 풍경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생태예술가 메리 헬가 만테레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태도를 ‘자연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3) 여기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자연의 세부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객이, 아니 인간이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결국 자연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이 품고 있던 감수성이 최대한 발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김일권의 회화에서 두드러진 수평선은 자연이 자연 그대로의 속도로 존재하는 상태,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조정(억제)한 상태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수평선’은 연속성을 의미하며, 여기서 말하는 연속성이란 결국 수평선이 함양하고 있는 자연의 연속적이고 편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수평선의 구도는 더 이상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적인 관점을 우위에 두지 않는다. 이 때문에 김일권 회화의 단순하고 명쾌한 회화적 구도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수평적’인 자세와 가치를 현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1) Meri-Helga Mantere, Coming Back to the Senses: An Artistic Approach to Environmental Education (2004); published at: www.naturearteducation.org (2021년 12월 접속).
2)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새가 날아와 그걸 쪼아먹으려고 들었다. 이에 기선을 제압한 제욱시스가 파라시우스한테 다가가서 커튼으로 반쯤 가려놓은 그림을 보려고 커튼을 만지자 그마저도 그림이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눈속임, 혹은 극도의 사실주의가 서구 고전미학의 중요한 비평적 기준임을 보여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2차원 평면의 회화는 결국 커텐 뒤의 세계로 향하는 창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고전적 예시이다.
3) Meri-Helga Mantere, Coming Back to the Senses (2004).
고동연은 국내외 아트 레지던시의 멘토, 운영위원, 비평가로 활동해 오고 있으며 2017, 2018 고양 야외조각축제의 커미셔너를 역임한 바 있다. 최근 저서로는 『소프트파워에서 굿즈까지: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현대미술과 예술대중화 전략들』(2018)과 『The Korean War and Post-memory Generation: The Arts and FIlms in South Korea(한국 전쟁과 후-기억 세대: 한국 동시대미술과 영화)』(런던, 러틀리지,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