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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표 개인전
​Destruction = Creation

2022.6.17(금) ~ 7.17(일)

 
김상표-켈지.jpg

■ 전시 안내

○일시: 2022.6.17(금) ~ 7.17(일)

○장소: 자하미술관

○시간: 10:00~18:00 (월요일 휴관)

○장르: 회화

○ 오프닝: 별도의 오프닝 행사 없음

■ 전시 소개

아나키즘에 기반 한 회화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김상표는 자신의 작업이 아나키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그리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가 쓴 비교적 긴 작가론, 자기 작품에 관한 논리를 접했다.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고 동시대 미술과 사상에 관한 전방위적인 관심이 폭넓게 드리워진 글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그림을 풀어내고자 한다. 여기서 그의 생각과 주제는 선험적으로 드러나 있고 이후 그림은 그것을 표상하는 차원에서 사후적으로 몸을 내밀고 있는 것 같다. 다분히 선언적인 그의 회화론을 보여주는 그림은 인간의 몸과 얼굴을 암시하는 격렬한 선, 몸짓만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사각형 화면의 틀을 따라 선이 이동하는 모종의 흐름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즉흥적인 감정의 발산이나 순간적인 몸의 충동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그래서 마치 몸과 감정을 그대로 찍어내는 듯한 그리기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몸을 화폭에 실제 낙관하듯이, 온몸을 휘둘러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기존 그림의 일반적인 모드에서 다소 비껴나 있는 편이다. 사실 무의식에 맡겨 그림을 그린다거나 기존의 제작방식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너무나 흔하게 접해온 것들이다.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속성 자체가 탈전통, 탈재현이었고 이후 미술은 지속적으로 기존의 미술 개념과 방법론을 끊임없이 반성, 부정해오면서 매 순간 미술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질문해온 역사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지금도 지속되는 한편 많은 작가들은 그러한 새로움을 어떻게 독특한 방법론과 단단하면서도 매력적인 조형의 힘으로 주물러 놓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오고 있다고 본다. 그것이 없으면 부정이나 새로움은 사실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카산드라 베델1+.gif

운명교향곡_카산드라 베델 1, 2020, 캔버스에 유채, 162.2 x 130.3cm

김상표는 자신의 신체의 흐름을 통해 단숨에 그리며 지우거나 덧칠을 하지도 않는다. 붓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대부분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리는데 온몸을 주어진 화면에 투기하듯, 퍼포먼스를 하듯 그린다. 이른바 핑거페인팅이자 액션페인팅 내지 마치 화면 안에서 춤을 추거나 검도나 태극권을 하듯 화폭 위에 물감을 문지르고 다닌 형국이다. 물론 그것은 결국 물감을 묻힌 손가락 힘의 강약에 따른 차이로 인한 여러 표정들이다. 읽을 수 있는 문자의 체계가 지워진 채 위에서 아래로, 혹은 사선 방향으로, 혹은 원형으로 돌린 선들의 교차만이 남아있는 혁필화를 보는 듯도 하다. 혁필화는 근래와 와서 부르는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비백서였다. 이는 비로 쓴 자국처럼 희끗희끗하게 붓 자국이 드러난 글씨체를 지칭한다. 붓끝이 잘게 갈라지고 필세가 비동飛動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버드나무나 대나무로 쓰는 비백서는 근대에 와서 가죽이나 두꺼운 천 조각에 여러 가지 색의 안료를 묻혀서 그림이나 문양과 함께 그린 혁필화로 발전했다고 한다. 보통 납작한 죽필竹筆을 종횡으로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곡선, 파선波線, 직선을 자유롭게 구사한 것인데 먹색 하나만으로도 풍부한 농담과 색의 차이, 선의 온갖 형세를 다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하여간 순간적으로 그어나간 혁필화 선의 자취를 유심히 보면, 선과 색의 풍부한 변화상을 만끽할 수 있다. 김상표의 그림에서 어느 부분이 그런 인상을 강하게 준다. 하여간 손가락으로 캔버스 화면에 빗질을 하듯, 할퀴듯, 긁어대듯 그리고 있다. 물감을 칠해서 덮거나 채워 넣는 게 아니다.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를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선과 색이 얼기설기 얽혀서 불규칙한 흐름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내 몸이 스스로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결국 나의 회화는 수행성으로서의 퍼포먼스에 다름아니다.”(작가노트)

 

작가는 특정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인간의 몸, 그러니까 춤을 추거나 격렬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신체 내지 커다란 얼굴을 형상화하고 있다. 색과 선이 한 몸으로 이루어지고 그리기와 칠하기의 구분이 없다. 물론 재현회화는 아니다. 물감을 그대로 화폭에 문지르고 다니거나 북북 그어대거나 휘젓고 다니는 등 다양한 방향과 강약의 조절을 통해 선의 풍부한 표정을, 물감의 물성이 지닌 색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편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추상도 아니다. 여전히 인간의 흔적이 어른거린다. 작가의 손가락, 몸의 움직임 혹은 붓을 부분적으로 이용해 신속하게 칠해놓은 흔적이 선, 색채, 물감의 질료성 그리고 인간의 몸과 얼굴을 동시다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바탕칠이 되어 있지 않은 하얀 캔버스 천은 그 위에 올려지는 손가락의 힘과 속도, 압력을 버티면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 발생 되는 여러 자취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나로서는 얼굴을 보여주는 그림이(418코뮨-PJL) 흥미로웠는데 핑거페인팅이 지닌 맛을 보다 적절히 통어해서 추려낸다면 묘한 에너지를 지닌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는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봤다. 무엇보다도 조형의 예리한 추려냄이 필요해 보인다.

 

작가의 얼굴 그림은 많이 그려지지 않은, 그리다 만 얼굴, 그리고 이내 지운 얼굴, 그릴 수 없는 얼굴이다. 마치 사라져가는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듯하는 손가락과 붓질에 의해 얼굴을 그리고 있기보다는 얼굴을 자해하고 두들겨대고 있다. 보여주기보다는 삭제하고 은폐시키는 것도 같다. 여기서 재현 대상과 이미지의 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얼굴은 온통 뭉개져 있거나 물감과 거칠게 짓이긴, 문지른 흔적뿐이어서 다분히 모호하다. 몇 번의 격렬한 신체의 움직임, 손가락의 운동은 얼굴과 인간의 형체를 가까스로 만들어 보이다가 이내 지워내고 있다. 그 얼굴은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다가 이내 좌절하고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다가도 그저 맥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실 모든 이미지란 그런 것이다. 이미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제가 될 수 없다. 실제를 보여주다가도 이내 사라져 버리고 실제에 가 닿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없이는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 김상표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미술의 경계와 운명 안에서 작업을 하고자 하는 것 같다.

​관람객 및 관계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