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대전(東經大全)-오월의 하늘>

5월 11일(화) ~ 6월 20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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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기간: 2021년 5월 11일(화) ~ 6월 20일(일)

○ 전시장소: 자하미술관

○ 전시장르: 회화, 영상, 설치

○ 참여작가: 강행원, 김범석, 김봉준, 김선두, 김호석, 김홍주, 민정기, 박영균, 박영근, 이길우, 한만영, 허진

19세기 초 조선은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 자연재해, 역병으로 인해 민생이 흔들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민중들의 마음에 혁명의 불씨를 심어준 근본정신은 동학이었다. 동학사상은 한 개인의 깨달음으로부터 기인한다. 그 자가 바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이다. 최제우는 피폐한 당대 사회의 모순에 통탄하며 입산하여 수양하던 중 1860년(경신년) 4월 5일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기이한 종교체험을 한다. 선생은 사회의 혼란이 천명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울님의 ‘도(道)’를 전하기 위해 포교를 시작했고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를 시켰는데, 그것이 동학이 창도된 배경이다. 물론 그가 깨달은 ‘도’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주관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동학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철저한 신분제도와 더불어 유학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최제우는 동학을 통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 평등 사상과 척왜척양(斥倭斥洋)의 민족사상을 강조했다. 동학은 타락되어 가는 사회의 제반 윤리를 부정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요구하여 인간성의 회복, 후천개벽 사상의 실천에 초점을 맞췄다.


마치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나 볼테르(Voltaire, 1694~1778) 같은 철학자들의 계몽주의 사상이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것처럼, 동학은 철저한 신분제 아래 농민들의 인권이 유린당하였던 사회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본주의의 민족사상을 바탕으로 평등을 향한 민중들의 마음속 열망이 발화되는 시발점에 있었다. 기존의 사유체계를 무너뜨리고 사회개혁을 향해 농민을 결집시키는 동학은 유림 층과 집권계층의 입지를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었고, 서학이라고 음해당하며 배척당했다. 이에 1863년 교주 최제우는 포교한 지 2년 반 만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손을 써 선생을 빼내려 했으나 최제우는 ‘이 또한 하늘의 뜻’이라 하며 신념에 따라 처형당했다. 최제우에게 동학사상은 목숨과도 같았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은 최제우의 20년간의 원고를 모아 『동경대전』(1880)과 『용담유사』(1881)를 간행하였다. 최제우의 ‘도’가 학문적이었다면 최시형은 ‘도’를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며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고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벌어진 교조신원운동(1864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변혁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초가 되었다. 전라도 고부에서 탐관오리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1)을 처단하고 탐리를 징벌하겠다는 목적 하에 사발통문에 농민의 이름을 쓰고 결의를 다졌던 고부민란(1894년)을 시작으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은 교주 최시형과 전봉준(全琫準, 1855~1895), 김개남(金開南, 1853~1895), 손화중(孫華仲, 1861~1895) 세 명의 지도자의 지휘하에 대규모의 조직적인 농민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점령했고, 전주성의 함락 소식에 조선 왕실에서는 청군에 파군을 요청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은 청이 군대를 파견하기에 앞서 군대를 파병하였다.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청군과 일군 간의 전쟁, 청일전쟁이 펼쳐진 한반도에서 동학은 조선 내부의 권력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에서 외세로부터의 자주독립, 즉 보국안민으로 그 기치가 바뀌었고, 이것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나라가 농민운동을 진압하기를 기대했던 조선의 왕실은 이 같은 상황에 원치 않는 외세의 간섭과 꺾이지 않는 농민들의 기세에 당황하며 동학농민운동군과 타협을 시도했다. 이 시기부터 동학농민운동은 본격적으로 반일항쟁을 시작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된 우금치 전투는 최신 무기로 훈련한 일본군과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일어난 농민들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들은 희생되었고,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이 처형됨에 따라 우금치 전투는 일본군에 대패한 전투로 기록되며 끝이 났다. 패전 이후, 농민군은 전주까지 밀려나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에 맞서 싸웠으나 연이어 패하면서 해산하였다. 하지만 외세와 결탁하여 자국민을 탄압하려던 부패한 정부에 맞서 반봉건 반외세의 목표를 내세우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동학농민운동은 항일항쟁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조선의 자주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다. 이러한 사실은 『동경대전』에서 시작된 동학의 사상과 동학농민운동이 표면적으로는 실패로 끝이 났지만, 혼란한 조선 사회에서 사회 개혁과 변혁을 이루기 위한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의례 지나온 역사를 단발적으로 기념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난 역사를 통해 한국의 고유 정서를 회고하고 앞으로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민족자주정신의 근간인 『동경대전』의 정신을 현시대에 다시 이끌어냄으로써, 한반도의 숭고한 투쟁의 역사로부터 환원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한다. 4.19 혁명, 5.18 민주화항쟁, 촛불혁명 등 현대 사회의 도처에서 일어나는 평등을 향한 외침이 있었다. 우리가 진정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어김없이 반복된다. “지금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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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주, 무제, 150x180x150, 캔버스에 유채, 농기구, 1993.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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