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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영 개인전

《구성적 틈

 2024.5.14 - 5.31

자하미술관

 

이미지(들)의 존재론

 

       황선영의 이미지들은 사물이나 의미에 정박해있기보다는 늘 스스로를 떠남으로 존재한다. 이미지들은 스스로를 떠나 서로를 향하고 서로에게 참여함으로써 서로의 한계가 된다. 서로의 안이자 바깥으로 기입되어 겹쳐지는 이미지들은 유사성이나 차이로 사유할 수 없는 공간을 연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말대로 이 공간에서 이미지들은 ‘닮았지만 아무 것도 닮지 않은’ 이중성으로 출몰한다. 근접하지만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이미지와 사물의 외적 차이는 사물 자체의 내적 분열, 사물의 한가운데에 있는 낯섦과 같아진다.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에 봉사하기 보다는 사물 속에서 의미화될 수 없는 공백을 겨냥한다. 이미지들이 하나의 통합된 의미나 다양성으로 환원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겹침’이다. 겹침의 공간 속에서 이미지들은 서로에게 열려 하나나 둘로 사유될 수 없는 미결정성,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고 어떤 것도 정착시키지 못하는 텅빔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블랑쇼의 말대로 이미지는 의미의 살해 이후에도 살아남아 출몰하는 나머지, 사물의 한가운데에 있는 공백(gaping intimacy)이다. 그것은 의미의 애도 속에서 완전히 종결될 수 없어 다시 돌아오는 유령의 귀환이다.

황선영의 이미지들은 일상적이고 친밀한 이미지들을 겹쳐놓음으로써 친밀함 속에 있는 낯섦을 드러내지만 이것은 단순히 친밀함에서 낯섦으로의 이행이 아니다. 겹침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을 깨우기 위해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동원하는 인식론적 각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친밀함으로 해소될 수 없는 나머지로 출몰하는 낯섦을, 낯섦과 구분될 수 없는 친밀함을 보여준다. 의미론적 이행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이중성. 친밀함과 낯섦은 낭시(Jean-Luc Nancy)의 말대로 이미 서로를 만지고 있다. 친밀함과 낯섦이 갖는 차이가 아닌 친밀함이 친밀함과 달라지고, 낯섦이 낯섦과 달라지는 ‘자기-차이’가 친밀함과 낯섦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스스로와 달라질 때 비로소 자신이 될 수 있는 ‘자기-차이’는 어떤 개념도 자기동일적으로 완결될 수 없도록 한다. 나는 타자에 노출될 때, 타자를 만지고 타자에 의해 만져질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사물이나 의미를 재현하는 이차적 재현물이 아니라 사물이나 의미가 완결될 수 없도록 하는 내재적 공백을 지시한다. 황선영의 작품들은 겹침으로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사물이나 의미 역시 자신의 바깥으로 확장되어 자신과는 다른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민승기(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작가의 글​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의 시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일상의 사물에서 경이로운 대상으로 변모시킨다. 그는 『사물의 편Parti pris des choses』에서 양초, 바구니, 굴, 빵과 같이 일상적인 사물들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신선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상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고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사물의 편이 되어서 대상을 바라보는 퐁주의 시선은 하찮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물에서 조차 경탄할만한 일상 속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시인이 사물을 바라볼 때처럼, 카메라의 눈은 세계를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듯이 세밀하게 관찰하게 하고, 기존의 맥락에서 벗어나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주변에 늘 있지만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재조명한다. 일상의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도 카메라에 포착되고 나면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사진 이미지는 대상을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사진에 담기는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라볼만한 것이라고 세상의 부유하는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서 부산한 시선을 멈추고 응시할 수 있도록 해준다. 사진 속에서 하찮은 것과 중요한 것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경계가 모호해진다.

 

퐁주가 빵의 갈라진 표면을 바라보며 알프스 산맥을 연상했던 것처럼, <그 너머에>는 가지의 곡선을 바라보며 광활한 언덕의 능선을 상상하며 만든 작업이다. <그 너머에>는 채소를 소재로 한 시리즈 중의 하나로, 일상적인 사물에서 거대한 자연을 떠올렸다. 보라색 양배추의 단면에 초점을 맞추며 끝없이 펼쳐질 듯한 지평선을 표현하기도 하고, 가지의 형태가 가진 곡선과 표면의 매끄러운 반사광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사물의 표면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를 질문한다. 사진 이미지 속에서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모티브들이 서로 결합되어 반복 가능한 하나의 모듈을 만들고 서로 다른 이미지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모듈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작업을 하기 위해 세심하게 옷감을 고르듯 사진의 프레이밍은 현실 이미지의 한 부분을 떼어온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현실의 한 단면이 잘려나와 이미지 소스가 만들어진다.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최소 단위로 쪼개진 분자들처럼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사진을 만든다. 단편적 이미지들은 동일한 이미지가 반전되거나 반복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이미지가 연결되기도 한다. 어떤 조합이 될지는 이미지 내부에서 결정된다. 이미지가 이미지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미지들 간의 관계 속에서 연결 지점들이 생기고 충돌과 결합을 반복하며 조합된 사진 이미지들은 또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이미지로 새롭게 형성된 이미지는 현실에서 왔지만 재현을 벗어나 재구성된 현실을 보여준다.

 

전체 작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프레이밍을 통해 현실의 한 부분을 잘라낸 후, 이미지의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해체구성deconstruction을 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글쓰기를 통해 해체 작업을 하듯이, 사진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해체구성 전략인 것이다.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해체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와 달리 해체는 재구성하기 위함이다. 데리다는 “해체는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해체는 경계를 와해시키는 작업이고, 모든 구별짓기를 와해시키는 것이 사랑이다. 물론 해체도 사랑도 파괴적이다. 온전한 나를 파괴하고 내 안에 타자가 들어오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주변의 모든 평범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경탄하는 마음, 따뜻한 시선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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