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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순포스터 최종.jpg

김화순 개인전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만월을 볼 수 있을까》

 2024.10.12 - 11.3

자하미술관

김화순, 파문 波紋 112cm×162.2cm oil on canvas, 2024.jpg

 

 

 

 

 

 

 

 

 

 

 

 

 

멈추지 않는 날갯짓으로_oil on canvas_112×162.2cm_2024

    김화순은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작가가 자신의 삶과 이야기를 작업으로 담아내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삶과 이야기를 대상화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실천의 장(場)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다름 아닌 ‘슬픔’과 ‘애틋함’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생때같은 아이들의 죽음을 직면했을 때 국가권력의 파멸적 위력을 우리 모두 경험한 바 있다. 김화순은 그 과정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처절하게 인식하게 된다. 사건의 문제를 쟁점화하고 전파하는 태도에서 피해자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공유하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사람과 생명에 대한 깊은 사유를 몸에 익힌 김화순의 작가적 태도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여성주의에 대한 치열한 관심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화순은 민중미술 계보에 속하는 작가 중 한 명이기에 부조리한 세계를 재현하는 형식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대학 시절 거리와 광장, 농촌에서 수많은 걸개 그림과 벽화를 공동 제작하고 졸업 후 지금까지 여성단체, 세월호상주모임, 연암환경미술행동 등에서 활동하며 여성, 환경, 평화 그리고 생명을 그리고 있는 그의 작업 궤적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만월을 볼 수 있을까_oil on canvas_157×300cm_2024

​그러나 민중미술은 저항미술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영웅 남성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반면 김화순의 그림은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면서 모두가 주인공인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수평적 질서를 그림의 형식에 담아내니, 그림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바라보고 위로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삶의 태도가 그림의 형식이 되는 김화순의 작업세계가 구축된 것이다.

이번 전시 《우리는 앞으로 몇번의 만월을 볼 수 있을까》는 이러한 김화순의 작업 세계를 본격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전시이다. 생명, 평화, 여성, 환경이 화두이면서 구체적인 주제로 작업 전반에 발현된다. 때가 무르익었음을 뜻하는 ‘만월’은 시간, 장소, 사람(생명)에게 모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만월과 같이 충만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이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유채영, 김휴초_​이제 댄스타임 (2024) web, interactiv platform 2024

 

이번 전시에서는 30여편의 회화작품과 3년 동안의 연안환경미술행동 퍼포머스가 영상으로 생생하게 전시되며, 참여형 웹 프로젝트 <이제 댄스타임(2024)> 섹션이 특별히 마련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20대 청년 유채영과 김휴초가 김화순의 ‘춤’에 공감하는 이들이 서로 메세지를 나누고 춤판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참여형 웹프로젝트이며, 전시장 2층에서 전시 된다.

김화순이 그리는 충만함이 깃든 세상. 슬픔을 넘어서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세상. 그 만월을 기원하고 그리지만 실현된 만월을 대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오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그의 작업 태도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현대 회화의 숙명과 궤를 같이한다. 그의 그림이 텍스트 기술에 어려움이 없을 만큼 명확한 도상들로 구성이 되어 있음에도, 계속 그의 그림을 주시하게 되는 이유는 아직 해석의 영역으로 도래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 회화에서 그것이 실재의 영역이라면, 김화순의 그림에서 그것은 염원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만월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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