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S
《점점 다가서는 우리들》
2024.6.5 - 7.9
자하미술관
타자와의 관계 복원을 위해
처음엔 충격적이었지만 이제는 무뎌진 몇 가지 지표들이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매우 높다는 점과 출생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OECD 국가 중 10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자살률에는 크게 신경 안 쓰더니, 출생률 문제에 대해서는 위기의식이 크다. 얼마 전 뉴스에는 ‘큰 전염병이나 전쟁 없이 이렇게 낮은 출산율은 처음 본다’는 외국 학자의 말(JTBC와의 인터뷰)을 인용보도했다. 삶과 죽음에 직접 관련된 이 통계는 한국 사회에서의 삶이 녹록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거의 다시 시작하다시피 한 한국은 최단 기간 동안의 극적 발전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더 이상 그때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비약적인 물질적 발전을 이루었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영역에서 ‘K-’로 시작되는 다양한 수출 품목들은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왔던 바로 그 지점에서 옆을 봐야 하는 시점이 우리를 낯설게 한다.
자하미술관의 기획전 [점점 다가서는 우리들]은 나와 우리의 관계성 복원을 요구한다. 나와 우리는 본질적이고 실체적이 아닌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이다. 예술 또한 그렇다.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예술은 공동의 영역을 물질적이고 상징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공간들과 관계들을 만드는 일을 한다고 정의한다. 그는 현대예술이 이러한 공동의 경향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만이다. 랑시에르가 지지하는 ‘관계적 예술’은 물건들이 아니라 상황들과 만남들을 창조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주체와 타자의 ‘사회적 관계들의 새로운 형태들의 고안’(랑시에르)이라는 점에서 ‘관계적 예술’에 속한다.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예술이 ‘우리’라는 공동체를 염두에 두는 것은 어색하고 부담스럽지만, 기존의 나와 우리에 대한 관념 자체가 변할 필요가 있다. 이 전시에서 나와 우리는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예술가 주체를 자명한 출발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기존의 협소한 나라는 관념으부터 탈출하려 한다. 그것은 대중소비사회가 그러하듯이 나에게서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갱신을 위한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갱신의 과정이며 결과이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자기 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자기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나의 유아론의 벽 가운데 타인의 시선이 통과할 수 있을 틈새를 만드는 것’(메를로 퐁티)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요컨대 나의 동일성은 철학의 주체였고, 모더니즘을 비롯한 근대 예술 또한 그 영향 아래에 있었다. 철학자 벵상 데콩브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동일자의 지평은 전체성이고, 그것은 무한히 자기 자신을 확장해 가는 힘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동일성의 원형은 고전주의 시대에 확립되었다. 고전주의는 보편적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며, 규칙을 잘 지켜 만들어진 형태와 변덕에서 해방된 기법에의 확신은 작품의 진리를 보장한다고 보았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도 동일자의 전체주의와의 관련성을 주장한다. 그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만약 타자를 소유하고 포착하며 아는 것이 가능하다면, 타자는 타자가 아니다. 소유하기와 알기, 포착하기는 권력의 동의어들’(레비나스)이라는 철학적 언명을 인용하면서, 동일성 속에서 전개되는 것은 ‘보는 것과 아는 것, 가지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자아의 본질적 계기들은 신체, 소유, 집, 경제’(데리다) 등이라고 불린다. 타자와의 공존 및 대화를 추구하는 이 전시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중시한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타자들과 ‘점점 가까와 지려할 때’ 자아 중심의 동일화 작용은 느슨해질 수 밖에 없다. 데리다는 존재론이 하나의 동의론(tautology)이고 자아론이라고 본다. [글쓰기와 차이]에 의하면 ‘타자는 오직 그 타자성이 절대적으로 비환원적일 경우에만 타자’(레비나스)이다. 환원될 수 없는 타자는 무한하며 이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전시의 키워드 중 하나인 ‘우리’는 나를 벗어나는 타자, 더 나아가 공동체를 말한다. 하지만 ‘나’처럼 ‘우리’ 또한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거의 도시에서 살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공동체란 현실이기보다는 이상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도시를 ‘이방인들이 서로 마주칠만한 장소’(리처드 세넷)라고 인용한다. 하지만 동질성에 대한 지향, 차이를 척결하려는 노력이 효과적일수록 이방인들을 대할 때 편안함을 느끼기 어렵게 되고 차이는 더욱 위협적이 되고 이것이 낳는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강렬하게 된다고 말한다. 조정된 공공의 이해는 믿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손쉽게 말하는 이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다. 하지만 예술에서 우리는 시작이 아니라 점점 다가서야 하는 미지의 존재이다. 예술과 대중이 거리가 먼 만큼이나 해법은 복잡하다. 예술적 주체는 대중소비사회의 논리와 달리, 목표와 방법이 확정된 제로섬 게임을 선호하지 않는다.
각자의 게임 원칙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대중이나 ‘우리’와 동일시되기 힘든 대목이다. 양자의 강제적인 연결은 한국의 특수성이다. 지금도 정체불명의 ‘우리’가 개인의 소신을 뭉개고 파행적인 정치 지형을 지속시킨다. 근대 제국주의 시대의 약소 국가들이 대체로 그러했듯이 한국 또한 역사적으로도 단절이 심했다.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외세 개입으로 인한 분열은 근대사의 비극이라는 거시적 차원부터 미시적인 일상사에 미치는 영향으로 나타나곤 했다. 축약된 근대화에 또 하나의 큰 변수가 정보화다. 정보화는 여러 차원에서 빈칸을 더 줄여왔다. 한국은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 인프라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제 사람과 사람이 아닌 정보기기를 매개로 소통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모두들 각자의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말하고, 자기 일상을 그럴듯하게 연출한다. 보고/보여지기를 위한 제의(祭儀)는 오늘의 인스타그램에서도 넘쳐난다. 그것이 소통을 대신한다.
현실에서 가상의 몫이 더욱 커진다. 24시간 온라인 상태에서 대화를 가장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적인 것 같지만, 실은 독백이고, 나르시시즘이다. 거울을 대신하는 가상거울은 자아의 상상적 요구의 장이 되었다. 상상의 세계는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인 동물적 요구와 인간사회가 가능한 상징적 우주 사이에 존재한다. 상징적 우주는 요구와 달리 만족하기 힘든 욕망으로 추동된다. 우리를 에워싼 다양한 고기능의 스마트 기기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받는 자극과 긴장을 풀어주는 해방구이자 다시 억압적인 반사거울로 작동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기 보호본능의 발동이다. 자연이나 역사처럼 횡적으로 종적으로 뻗어나갈 시공간이 협소한 상황에서 인간 간의 게임이 중시되는, 좋게 말하면 인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서로 얽혀 괴롭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어떻게 소통과 치유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점점 다가서는 우리들] 전은 피폐해진 관계가 복원되어야 하고 이때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기대한다.
전시는 다양한 쟝르의 작가 12명이 참여했고, 서로를 ‘돌아보고’, ‘함께하고’, ‘교감하는’ 주제의 작품들이 모였다. 서로 연결되는 행위들에는 모두 ‘점점..’이라는 접두어가 붙는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규정되는 도덕적인 당위보다는 조금씩 실천하는 과정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공존과 교감은 우선 타자들에 개방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이 가능한 조건은 주체 자체가 타자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의 인식이다. 주체는 순수한 본질이 아니다. 자율과 자유에 대한 기대도 요원할 따름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출발점이 아니라 어디에 언제 도달할지 모를 목적지에 있다. 무엇인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듯한 잔여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인간상(곽인탄), 조합과 해체가 유동적인 퍼즐로 이루어진 풍경(손원영), 기억이 주체를 구성하는 중요성을 가짜 향수(鄕愁)로 해체(머피염)하는 작품은 타자들로 이루어진 주체를 표현한다. 한편 동일자와 타자의 밀접한 관계는 예술의 형식 그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어서, 근대에 확립된 시각의 순수성에 대한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공감각적 번역으로 상대화(이다희)하는 작품들이 포함될 수 있다.
일상에서 고갈되는 삶이 그림일기처럼 집합(김허앵)되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작업하는 이의 불안함(정문경)이 표현된다. 그들 모두는 우연찮게 여성이다. 세상의 반인 여성은 다양한 타자들 중 가장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작가이자 여성은 자신의 문제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공론화한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유령처럼 억압해야 하는 그림자 노동(조혜정)이나 예술이 자율화되기 이전에 삶의 총체적인 양식이었던 장식과 여성적 삶을 호출(이피)한다, 심리적 문제를 넘어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타자화는 사회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고가 주변화시키는 자연(유화수), 자연으로부터 서로를 지탱하며 연결되는 모델을 발견(정기현)하고, 지배적 사회가 기준에 의해 비정상화되는 존재들(이지양)이 다시 중심에 놓인다. 공간의 물신주의로 인해 가장자리로 물러나야 하는 이들의 풍자적 감각(이원호)을 찾아볼 수 있다.
1. 타자들로 이루어진 동일자 ; 곽인탄, 손원영, 머피염, 이다희
● 곽인탄
곽인탄은 레진으로 만들어 색을 칠한 작품 [Flat Study 7]에서 땅과 하늘을 이으며 당당하게 서있는 기념비를 원형으로 하는 조각의 모델을 해체한다. 정사각형 판에 모여 있는 인체형상의 잔해들은 색색의 아크릴 채색으로 얼버무려 진다. 기념비적인 존재여야 할 조상은 마치 녹아서 평평해진 듯한 모습이다. 작품 [Movement 21-1]은 레진, 철, 스텐, 타공판, 퍼티, 에폭시, 바퀴같이 잡다한 산업 생산물이 집합된 입상으로 순수한 단일체로서의 조각, 또는 인간에 대한 패러디가 된다. 작가에 의하면 이 작품은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의식이라는 중심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무의식은 주체의 통일성을 해체한다. 해체는 확장이기도 하다. 타자로 이루어진 주체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노동과 생산 중심 사회에서 벗어난 존재가 그렇듯이 말이다. 다른 작품에 비해 조화로운 색감을 가진 작품 [한량 1]에서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는 서커스의 광대처럼 아슬아슬한 유희를 즐긴다.
● 손원영
손원영은 희미해진 형태와 상징적 색이 서로 보충하여 만든 세계를 보여준다. 형태나 색은 단독의 조형적 언어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양자는 상호보완적이다. 작가는 관계를 중요시 한다고 밝힌다. 색은 경계가 확실해야 할 형태를 완화시키고, 형태는 추상적인 색에 구체적인 질감을 부여한다. 작품 속 대상은 숲, 유적지, 성당같이 이미지들이 어렴풋하게 보이는데, 그 모두는 겹과 결이 풍부한 대상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손원영의 작품에서 풍경에 서사를 부여할만한 인간은 드러나지 않는다. 연극으로 친다며 무대만 있는 셈이다. 물론 그 무대조차도 색의 입자로 이루어진 장(場)으로 변화한다. 숲은 ‘푸르다’를 공유한다. 또 다른 숲 풍경은 멀리서 보면 숲이지만 가까이에서는 무수한 입자로 보이는 광경이다. 모노톤에 가까운 색의 삭감은 재현된 세계를 추상화한다. 푸른 숲은 물론이고, 아무도 없는 유적지는 안갯속으로 사라질 듯한 회색빛, 장중한 성당 내부는 화려한 보랏빛으로 채워졌다.
● 머피염
침이 있는 시계, 재봉틀같이 오래된 물건은 이제 생활 속에서는 기능을 다하고 색다른 사물이 된다. 현대산업사회는 상품의 주기를 가속화시켜서 유행이 금방 지나고 그것이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불확실해진다. 최초의 상품화 이후의 또 다른 회로에 진입하는 상품들은 사물이나 예술이 된다. 그것들은 기능이 아닌 존재이며, 의미 또한 존재로부터 생겨난다. 초현실주의는 새롭게 등장한 것들이 급속하게 사라지는 현대의 물건들에서 무의식을 발견한다. 작품 속 시계나 재봉틀은 의식(필요, 기능, 실증성)으로부터 모호한 사물에서 무의식이 풀려나온다. 자동적으로 글자를 수놓는 기계는 무의식을 심층 깊이 파악하지 않고 현대의 일상적 물건과 연동되는 ‘기계적 무의식’(펠릭스 가타리)을 떠올린다. 작품 [어느 드라마투르기의 고장나버린 시계]에서 고장난 시계 또한 최소한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한 순간이 있다. 작가는 고장난 채 또는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에서 ‘허구적 노스탤지어(Fake Nostalgia)’를 읽는다.
● 이다희
클래식 음악을 추상미술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이다희의 작품은 [J.S.Bach - Prelude in eb minor bwv853]라는 작품 제목처럼, 음악이라는 또 다른 분야를 가리킨다. 음악과 미술의 공통 분모는 추상이다. 그래서인지 미술사에서 초기 추상화가들은 음악과의 관련 속에서 작업을 많이 했다. 음악은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과학기술자와의 협업을 통해 ‘음악 번안 시스템’을 연구해 왔다. 미술은 음악 뿐 아니라 그 문법이 상당히 차이 나는 과학기술과도 대화한다. 추상이라는 자율적 미술의 한 가운데에 타자와의 대화가 있는 것이다. 비슷한 형식의 작품 여러 점이 연결되어 한 점 같이 보여지는 작품들은 몇 개의 사각형을 병렬하고 그 내부로도 사각 형상이 내재한다. 중첩되는 사각형은 내부로 외부로 반향되는 음악적 울림이다. 기본 형태를 변주시키는 다양한 방식은 음의 고저가, 미묘한 색감의 변화는 음의 조화를 시각적으로 번역 또는 기록한다.
2. 가장 보편적인 타자 ; 김허앵, 조혜정, 정문경, 이피
● 김허앵
24시간 풀 노동이라는 육아의 경험이 드러나는 작품 [Daily routine]은 아이와 함께하는 그 시공간처럼 정신없다. 130.3×130.3cm 정사각형 구도는 무질서를 규칙적인 무엇으로 경계짓는다. 이 작품은 ‘1992년도에 발매된 게임 돌아온 너구리의 스테이지’를 차용하여 그린 것이다. 장난감을 비롯한 모든 물건들은 흐트러져 있으니 아이나 엄마나 손과 발이 여럿일 수 밖에 없다.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누워있는 사람은 삶의 강도에 대한 단적인 표현이다. 화면 여기저기에 제각각의 사연이 있는 다중심적인 작품은 예술이 초월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무색하게 한다. 작가는 [너머의 지도The Map beyond]에서도 아이의 그림처럼 소박한 화법으로 일상의 단편들을 정사각형 프레임에 집합시켰다. 마치 희미한 기억처럼 계절과 장소가 한데 뒤섞여 있다. 반려동물의 죽음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동화나 게임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예술과 놀이는 직접적인 현실과 거리를 두는 완충의 시공간이 된다.
● 조혜정
비디오 설치작품 [담을 넘어가는 경우의 수]는 그림자 노동이라는 주제와 관련된다.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그림자 노동’이라는 명칭을 붙어서 공식 경제에 편입되긴 했다. 작가가 주목하는 ‘아브젝트’의 노동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러한 색다른 이론적 명칭이 붙어졌다고 해서 그 잡다한 일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수고가 실제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공식 부분으로 코드화할 수 없는 일과 결국 ‘담을 넘는’ 행위와 비교한다. 경계를 넘는 행위, 즉 대부분 비합법적인 행위는 사회적인 위치가 없고 경제적 보상도 불확실하다. 그런데 예술 또한 바로 그러한 경계선 상의 영역에 속해 있다. 최근 작품 [센서스 코뮤니스]는 ‘일터이면서 거주지이기도 한 작업실과 연관된 작가들의 사정’과 연관된 것으로, 물건들이 빽빽한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예술가도 노동자처럼 더 열심히 할수록 더욱 곤란에 빠지는 타자의 입장에 놓인다. 필요한 일은 타자들끼리의 사회적 연대일 것이다.
● 정문경
작품 [Akimbo]에서는 ‘손허리 자세’(아킴보)를 하고 있는 인형들이 오르골 소리와 함께 회전한다. 아킴보는 자신만만과 자기보호라는 상반되는 자세를 중첩시킨다. 공포영화에서도 겁먹은 이가 더 공격적으로 나오곤 한다. 반복적으로 고갈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잘난척이 필요한 이유다. 작가는 한 틀에서 찍혀져 나온 공산품을 선택함으로서 능동적이어야 할 주체의 위상에 의문을 품는다. [Walk a fine line]은 목마인형을 줄에 매달아 붉은 갈퀴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 피가 쏠리는 듯한 감정을 표현한다. 작가는 천진한 장난감을 잔인한 상황극으로 변화시킨다. 보자기에 쌓여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니터가 백색 소음을 발생시키는 작품 [White noise]는 ‘모든 기능은 여전히 정상적이지만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도록 강요된 상황을’ 표현하였다. 대량 생산품을 활용하는 정문경의 화법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 이피
장지에 먹, 색연필, 금분, 수채같은 다양한 재료를 쓰는 이피의 작품은 고려 불화의 세밀한 기법이 가세되어 만화같은 발랄한 도상을 차분하고 분위기 있게 반전시킨다. 작품 [내 장례식 후의 나만의 미술작업]은 작업을 추동하는 작가의 위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화려한 장례식이 끝난 작가는 지하의 작업실에서 헐벗은 채 작업에 몰두한다. 몰입을 위해서는 어떤 자아나 주체는 상징적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작업을 통한 부활에의 기대와 함께 한다. 우리는 근현대사에서 외쳐졌던 신, 역사, 인간, 예술의 죽음 등에서 종말 보다는 갱신을 보아왔다. 모호한 제목의 작품 [LCGC]는 가위를 들고 춤추는 여성들이 여성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줄을 끊어내는 듯한 경쾌한 춤을 춘다, 작가는 전통만큼이나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여성이든 전통이든 현대에 의해서 타자화된 것이고 작가는 타자들을 작품 한가운데로 불러세운다.
3. 가장자리에서 ; 유화수, 정기현, 이지양, 이원호
● 유화수
도시는 공원 및 가로수 등 식물들로 치장되어 있지만, 늘 인간이 중심인 공간의 가장자리로 물러나야 한다. 간판이나 조망권을 위해 큰 나무를 베어낸 건물은 물론이고, 당시의 유행에 따라 멀쩡한 나무를 없애기도 한다. 인공물보다 자연이 더 신선하게 다가오는 탈근대의 시대에 역행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개발과 재개발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현대 도시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의 자리는 불안하다. 작가는 [재배의 몸짓]에서 30여년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자라던 나무가 제거된 사건을 통해 자연이 또 다른 쓸모를 위해서 재배치 되는 과정을 표현한다. 잘려 나간 큰 나무의 밑둥에서 자라는 기생식물인 버섯이 재배되는 스마트팜의 모습은 인간의 필요에 맞게 자연이 코드화되는 과정을 은유한다. 자연과의 공존이 아닌 이용 더 나아가 착취의 모습에서 타자의 운명을 본다. 하지만 타자에게 저질러진 일은 다시 주체에게 돌아온다. 인간들 또한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 자연처럼 제거되고 불구화된다.
● 정기현
소나무 가지들을 둥글게 엮은 작품 [나무로부터]는 까치 집의 구조처럼 단단하다. 가는 나뭇가지들이 서로를 지탱하며 눈비와 바람을 견뎌내는 보금자리처럼 유연하면서도 견고해 보인다. 그는 이 설치 작품에서 넝쿨식물인 인동초 화분을 바닥에 놓고 죽은 나뭇가지를 타고 위로 올라가게 한다. 맨 위에는 지름 75m 정도의 나뭇가지들을 깍아 엮은 작품이 걸려있다. 실제의 자연에서도 죽은 나무 기둥이나 전봇대 등을 산 식물이 뒤덮어 기괴한 실루엣의 형체들이 발견되곤 한다. 오늘날 자연은 인간의 착취에 내맡겨진 대표적인 타자지만, 예술가에게 자연은 다양성의 모델로 예술적 참조 대상이 된다. 그의 작품에는 산 것과 죽은 것, 직선과 곡선, 자연과 예술 등이 공존한다. 작가는 자연적 소재를 활용하여 수평적으로, 수직적으로 엮어낸다. 관념적으로는 대조되는 이 항목들은 느슨한 병렬이 아니라 서로의 조건이 되는 긴밀한 관계적 구조를 이룬다.
● 이지양
이지양은 ‘장애와 비인간 동물에 대한 담론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정상/비정상이라는 기준으로 타자화되는 장애,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타자화되는 동물은 우회로를 거쳐 연결된다. 그 기준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규칙일 뿐이다. 하지만 마치 객관적인 법칙처럼 작동하는 규칙은 점점 더 많은 존재들을 타자로 내몬다. 사회는 차이를 차별로 만든다. 단채널 영상 [맨 온 더 문(Man on the Moon)]에 등장하는 이는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는 무용수를 모델로 한다. 지구와 다른 별이라면 다른 강도의 중력을 받을 것이다. 작품 제목이 은유하는 바에 의하면 장애인은 같은 별에서 다른 중력을 받고 살아가는 이다. 작품 [우리는 모두 다른 템포로 걷고 다른 리듬으로 손짓한다] 또한 하나의 방향만을 가리키며 폭주하는 지배적 논리와 다르게 각자 다를 수 밖에 없는 템포를 부각시킨다. 작가는 ‘정상’이 애써 무시하려는 ‘이상’을 통해 동일성의 논리를 해체하는 다양한 타자들의 고유 리듬을 보여준다.
● 이원호
작품 [Looking for]는 부동산 홍보물 위에 금박을 입힌 것으로, 가장 흔해 빠진 것과 귀한 것을 밀착시킨다. 작가가 수집한 홍보물은 주로 상가 주택부터 주택 분양, 아파트 분양 등에 관련된 것이다. 추상적으로 공간을 구획하는 현대사회는 삶의 터전을 실제의 사용 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간주한다. 교환의 회로에 편입되는 집은 물신숭배의 대상이 된다. 작가가 황금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물신을 불러들인 이유이다. 하지만 교환가치를 보증하는 기준인 황금조차도 가상적인 것으로 변화(금본위제도의 붕괴)하는 현재, 황금의 양태 또한 전단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전단지처럼 많이 ‘찍혀지는’ 건물들이 황금처럼 희귀해지는 이유는 그것을 향한 자본과 욕망의 교착 때문이다. 자본이 자본을 낳고 욕망이 욕망을 낳는다. 이러한 거대한 동어반복은 자연적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추동된다. 싸구려 대량 인쇄물은 금으로 덧입혀졌지만, 그 허약한 지지대는 우글거리는 표면으로 나타난다.
이선영(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