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랍고 우발적이고 불안정한,
그것들은 ‘우연히’ 얼마나 놀라운가.
그녀들은 얼마나 우발적인가.
그는 얼마나 불안정한가.
-‘나’의 변환, 김윤환
‘크니다리아’는 ‘특정하기 어려운 종(종족)’, ‘우발적이고 불확실한 현상’, 그리고 ‘사회와 국가를 기이하게 지탱하는 불안정한 제도’를 암시적으로 지칭하며, 김윤환의 다변적인 정체성과 다채로운 활동 양상을 비유하기 위해 설정한 핵심 키워드이자 전시명이다. 이 명칭은 말미잘, 해파리, 히드라, 산호 등을 포함하는 자포동물 “Cnidaria”의 라틴어 발음에서 비롯되었다.
자포동물은 살랑이는 가늘고 긴 촉수를 어여삐 뽐내는 수중 식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촉수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먹이를 마비시켜 포식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유연하면서도 치명적인 무기다. 투명하고 유영하는 그들의 모습은 연약해 보일지 모르나, 생존 방식은 치밀하고 능동적이다.
특히 산호는 다양한 해양 생물의 서식지를 제공하고, 환경 오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태적 센서로서 지구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포동물은 말미잘이나 산호처럼 바닥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고착형과, 해파리나 히드라처럼 물속을 떠다니며 살아가는 부유형으로 구분된다.
자하미술관에서 개최되는 김윤환의 다섯 번째 개인전 《크니다리아 Cnidaria》는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한 대형 전시로, 작가의 1988년 페인팅 작업(다수)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업 세계를 포괄한다. 설치형태로 소개되는 작품 군은 1988년-1999년 사이의 페인팅,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파리 시기 제작된 단채널 비디오 작품(3),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오아시스 프로젝트(국내외)시기의 프로젝트와 퍼포먼스 재연 설치(영상, 사진, 오브제 등 : <독일 정원>, <성냥도시>, <핵토론>, <혓바닥 축구> 등), 국내외 퍼포먼스 아카이브 사진(12점), 서울, 싱가포르, 인도네이사에서의 거리 퍼포먼스 영상(3)을 포함하며, 2000년대 중반부터-2020년대 행정아트 시기의 오브제와 관련 자료가 소개된다. 이와 더불어 2025년 기표드로잉 시리즈, <파시즘의 냄새>(설치), <꺅>(퍼포먼스)을 포함한다.
이번 전시는 김윤환의 작업 세계를 크게 네 개의 파트로 나누어 구성한다. 각 파트는 작업과 프로젝트 변천에 따라 시기별 기점을 중심으로 설정되었는데, 첫 번째는 2001년 1월 1일, 김윤환이 김강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기 이전 시기, 두 번째는 2001년부터 2003년 초까지의 유럽 활동 시기, 세 번째는 2003년부터 2012년 사이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한 국내외 활동 시기, 네 번째는 2007년 말 문래동 ‘랩39’ 개소와 함께 본격화된 ‘행정아트’ 시기다.
각 시기는 각각 ‘정착_말미잘 시기’, ‘부유_해파리 시기’, ‘변환_히드라 시기’, ‘서식지 구축_산호 시기’(혹은 ‘피를 빨린 거머리 시기’)라는 별칭으로도 명명된다. 이번 전시는 각 시기를 간결하게 압축해 소개하고, 최근작들과 함께 재구성함으로써 관람의 흥미를 높이고자 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시기는 유럽 활동기와 오아시스 프로젝트 시기에 해당하는 ‘해파리 시기’와 ‘히드라 시기’다. 이 시기는 김윤환 작업 세계의 전환점일 뿐 아니라, 시대적‧미술사적 맥락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다. 시대적으로 보면, 북미와 유럽 간의 대응 구도가 탈식민 이후 다문화주의에서 ‘기후 정치’와 ‘정보 정치’ 중심으로 재편되던 시기였으며, 현대미술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기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윤환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순발력 있는 활동형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구체화했다. 그는 동료이자 파트너인 김강과 듀오 콜렉티브를 결성해 활동을 본격화했으며, 새로운 전지구적 헤게모니의 재편과 쟁탈 상황에 대응해 구체적인 한국적 현실, 상황, 맥락을 바탕으로 세계사적 현안에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프로젝트를 펼쳐나갔다.
국내에서 ‘예술 스쾃’과 ‘오아시스 프로젝트’로 알려진 일련의 사건형, 과정 중심형, 연대(네트워크) 기반의 콜렉티브 프로젝트는 탈식민 독립 이후 여러 굴곡을 겪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김윤환과 김강 콜렉티브는 교착 상태에 빠진 도시 공간들을 해방시키자는 취지에서 제도적으로 포섭되지 않는 잉여적 생명활동을 예술가 연대와 사회적 개입의 형태로 지속했다. 이들의 작업은 직접성, 즉각성, 우발성 등의 특징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전개 과정에서 경작되는 따뜻한 유머,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개방성, 누구나 흔쾌히 참여할 수 있는 긍정성과 활달함이 그 주요 특징으로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관련 오브제, 아카이브 사진과 영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2000년 이전 페인팅 작업에서 나타났던 주관주의적 허무주의 경향을 접은 이후, 김윤환은 2001년 이후 현재까지 프로젝트를 통해 현장 중심의 순발력과 활달함을 바탕으로, 특유의 현실 감각과 민첩함을 발휘해왔다. 팀 빌딩과 연대 구축, 느슨한 커뮤니티 형태의 협업 활동까지 지속해오며, 실로 팔방미인이라 할 만한, 아니 '크니다리아'식이라 부를 만한 다면적인 작업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업은 알레고리 혹은 암시의 방식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탈식민 이후라는 맥락 속에서 1960년대와 1980년대,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식민 국가들의 독립 투쟁과 그 실패들, 국가 폭력의 미시적 변형과 그 지속에 대한 안타까움과 상황적 아이러니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실제 프로젝트 구현에 있어서는,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도시라는 복잡한 형태를 재구성하며, 불완전한 불안 속에서도 기이하게 편안한 감각을 제공한다. 그 안에는 다양한 삶의 양상과 거기서 파생된 잉여적 사건, 부산물적 현상과 오브제들이 유기적으로 동원된다.
김윤환의 퍼포먼스가 블랙 유머적 제스처를 통해 작동한다면,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새로운 유형의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다양한 만남과 연대가 우연처럼 퍼져나가며 커뮤니티가 발현시키는 긍정적 효과가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계획되지 않았던 정동의 집합이 흥을 증폭시키는 사건으로 발전하는 그 순간들—바로 이것이 과정 중심 예술 프로젝트가 지닌 고유한 매력이며 긍정성이다.
물론 이번 전시가 이러한 모든 면모를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개인 김윤환, 공동체와 연대의 한 행위자로서의 김윤환,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을 예고하는 김윤환까지를 함께 조망하고자 한다. 수십 년에 걸쳐 몸담아온 현장 활동 속에서 드러나는 구체성과 긍정성, 즉각성과 직접성, 그리고 유머와 농담의 제스처는 김윤환 작업의 미학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는 앞으로의 작업과 기획에서도 더욱 흥미롭고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어낼 것임이 분명하다.
말미잘 시기
‘우연’처럼 등장한 종으로서의 윤환이 ‘미술’이란 것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페인팅’으로부터 출발한 시기를 말미잘 시기로 잡았다. 이 시기는 김윤환의 유년기인 대구시절과 청년기인 미대시절, 현장 활동시기 중 2000년까지를 포함한다. 어머니를 그린 그림은 작가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뿐만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에도 남는다. 청년기 그림들 중에는 지구온난화와 오존층 파괴, 지구를 오염시키는 인간의 파괴적 행위를 비판하는 주제의 작품들도 눈에 띈다. <지구를 뜯어 먹는>(1999), <세기말의 두려움>(1999), <해골 속 그저 메마른 나무 한 그루, 인간은 허무>(1999) 등은 세기말적 불안과 허무주의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 작품들은 강렬한 원색과 거침없는 붓질이 특징적이며, 초록의 풀과 흙빛 대지, 해골로 상징된 죽음, 붉은 색으로 표현된 파괴와 고통 등이 주된 시각적 요소다.
김윤환은 1965년, 대구 서구 비산동의 논밭 사이 미나리꽝 주변 초가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 회고에 따르면, 박정희–전두환 시기의 선택적 도시화 속에서 도시 근교는 ‘지방’으로 상대화되었고, 이로 인해 풍습과 세련됨, 그리고 야만성이 구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 천변이 있는 지역의 다리 밑에서는 여전히 개를 때려 잡았고, 그 고기를 이웃끼리 나눠 먹던 일이 일상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을 회고하는 이들에게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인 1979년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보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던 피비린내 나는 구타와 개고기의 맛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일상 폭력이 다반사였던 유년기 동네의 풍경은 학창 시절을 거쳐 군 복무 시절까지 이어졌다. 윤환에게 일상 속 폭력은 색과 냄새처럼 감각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중학교 시절에 맞았던 기억과 군 복무 시절의 경험은 구두발과 군화발질, 그리고 그로부터 풍겨지던 구두약 냄새와 함께 기억된다고 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시작되었고, 이듬해인 1981년 윤환은 대구공업고등학교 미술부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미술을 접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8년 4월 1일부터 7일까지, 그는 이십일세기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 《내 기억 속의 사람들》을 개최한다.
청소년기 윤환의 특이한 이력 중 하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다는 점이다.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40대에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었고, 막내아들 윤환은 교회에서 사회생활을 배웠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평화롭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인 어머니와 기독교인 아들의 실제 삶에서 ‘종교’가 그리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윤환의 그림에서는 세기말의 분위기를 한껏 담은 청년이 자유롭고 싶어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어머니는 어머니 그대로의 ‘어머니’로서 그려진다.
해파리 시기
윤환은 도시 근교에서의 정착 생활을 벗어나 유목적인 예술인처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이어갔다. 떠나고, 되돌아오고, 다시 떠나는 시기를 윤환의 해파리 시기로 설정했다. 그는 중대 안성 생활을 접고 대구로 돌아갔다가 서울로 이주했다. 이후 홍대 앞, 왕십리, 서유럽, 홍대 앞, 동유럽, 남미, 동남아시아, 문래, 성수, 금천, 연천, 통영, 팽성, 신안, 포항, 성수 등 다양한 지역을 거쳐 작업실을 옮기며 생활을 이어갔다. 이 중 해파리 시기는 주로 ‘유럽’ 시기에 한정되며, 2001년 1월 1일 김강과 함께 윤환이 프랑스 쁘와티에로 이동한 시점부터 2003년 8월 서울로 돌아오기 전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 윤환은 아트 게임 비디오 제작, 단독 퍼포먼스 실행, 김강X김윤환 듀오 퍼포먼스,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형태로 활동을 이어갔다. G8(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러시아)의 강대국 놀이와 한국의 가부장제를 희롱 놀이로 비유한 <블록게임>(단채널 영상, 3분 20초, 2002), 백남준의 비디오 콜라주를 오마주한 <TV 꼴라주>(단채널 영상, 6분 16초, 2003), 어린아이의 주사위 놀이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26개국의 자료 영상과 결합한 <주사위 놀이>(단채널 영상, 11분 3초, 2003) 등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윤환은 퍼포먼스와 오브제 설치를 결합한 방식을 주요 전시 방식이나 프로젝트의 결과 설치 방식으로 활용했다. 오브제들은 주로 당시 상황에서 임의로 수집한 박스들이나 판화 기법을 이용해 빠르게 이미지를 찍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의 작업은 재활용 폐품을 활용해 구조물을 만들거나 현장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002년, 쁘와티에 시내의 르 꿀레르 뒤 떵 갤러리 초청으로 환경 관련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세계 질서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질서로 재편된 시기였다. 당시 유럽의 경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에서 다문화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강박(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일컬어짐)과 세계화의 압박 사이에서 새로운 이슈로서 ‘기후 정치’를 표방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1997년 도쿄 의정서 이후 유럽에서 기후 이슈가 전면화된 계기로 2003년 유럽 폭염이라는 사건 뿐만 아니라, 달러 중심의 금융 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유로가 유럽의 공식 통화로 설정된 시기였다는 점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 경제 질서 재편 상황에서 지구 온난화라는 환경 문제는 단순히 윤리적 이슈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경제적 헤게모니 쟁투의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생태’, ‘환경’, ‘새로운 자본’의 문제는 상호 대항 구도를 형성하며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윤환은 이런 세계 정치경제적 역학을 현지에서 직감했다. 마침 윤환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거리에서 그래피티로 환경 문제를 이슈 삼아 저항적인 퍼포먼스를 벌이던 현지인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미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환경 운동 단체 활동을 하며 오존층 파괴, 환경 오염, 지구 온난화를 주제로 작업을 해왔던 윤환에게, 현지에서 벌어지는 환경 관련 퍼포먼스와 행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당시 윤환은 환경 문제 자체보다는 유럽의 정치적 올바름의 태도에 대해 다른 각도의 시선을 장착하게 되었다. 당시 윤환이 퍼포먼스를 진행한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는 이미 제국주의가 신자유주의와 만나, 북미와 유럽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의 헤게모니 쟁투가 밀레니엄을 전후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면화된 형태가 바로 ‘기후’라는 이슈였다.
2001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윤환은 국내에서 근대 인간과 환경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페인팅, 거리 퍼포먼스, 설치형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의 작업을 시도했다. 이후 2001년부터 2003년까지의 프랑스 체류 기간 동안, 윤환은 유럽 현지에서 두 가지 상반된 맥락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민족주의 극복을 화두로 삼아 펼쳐온 ‘이방인 환대’, ‘인권과 자유’, ‘기후 정의’ 담론이며, 다른 하나는 달러와 금융 중심으로 재편된 신자유주의 질서라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이 두 맥락이 벌이는 복합적인 ‘게임’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윤환은 기존의 관점을 벗어나 그 양자를 낯설게 바라보는 ‘제3지대적 시선’을 갖게 되었다.
히드라 시기
프랑스 시기를 마친 후, 윤환은 비교적 빠르게 귀국했다. 이때부터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구체화되었으며, 이는 독일 팡코 국제 퍼포먼스에서의 ‘파라다이스 벙커’ 퍼포먼스 참여, ‘예술인회관 점거’, ‘문체부 앞 1인 시위’, ‘동숭동 빈 김밥집 한 달 점거와 프로젝트 실행’(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핀란드 에스토니아 디버스 유니버스 국제 퍼포먼스 참가, 파리 스쾃 알터나시옹에서 오아시스 프로젝트 전시, 쌈지 입주 후 예술포장마차 오아시스 운영 등으로 이어졌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국제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2012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를 ‘히드라 시기’로 정의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어여쁜 생물 히드라의 날카로운 촉수들을 한국 사회와 현대 미술계 곳곳에 접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포부와 취지에서 신화 속 히드라처럼 야심찬 기획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윤환의 퍼포먼스들은 힘의 대결을 풍자하듯 주로 ‘게임’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퍼포먼스 아카이브 사진, 영상, 오브제들을 전시한다. 사진의 경우는 <사상이 불온한 비둘기)(2004, 서울), <밥이 조국이다>(2005, 서울), <걸레퍼포먼스>(2005, 서울), <국회기자회견>(2005, 서울), <이건희보다 못한 오리>(2005, 서울), <What is your motherland?>(2008, 칠레 산티아고, <<칠레 제2회 퍼포먼스 비엔날레 : DEFORMES>>, <통그풋볼>(2008,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Arte Otro en Urguay, Plaforme. <<Latin America Action Tour>>), <콜트콜텍 프로젝트>(2012)의 주요 장면들이다. 퍼포먼스 영상은 <예술하는 대통령_싱가폴, 인도네시아, 서울>(2007)이며, 재연 기반 설치물 <독일정원>(2005_2025), <성냥도시>(2003_2025)에서 퍼포먼스 영상이 소개된다. 또한 <파시즘의 냄새>(2025)는 초연 설치물로 소개된다.
전시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퍼포먼스 당시 제작되었던 실물과 이번 전시를 위해 재제작된 경우들이 병행된다. <대통령상 걸레>(<걸레퍼포먼스>, 서울, 2005), <만국기 샹들리에>(<핵토론>, 됴쿄와 요코하마 등지, 2011), <먼지글씨>(<콜트콜텍 프로젝트>, 부평, 2012) 등과 재연 설치물에서의 <통크풋볼 골대>, <통크풋볼 공> (유로화, 엔화, 가상화폐를 연상시키는 오브제로 만든 작은 미니어처 골대와 공, 이는 추파춥스 혓바닥 축구 퍼포먼스에서 전개됨, <혓바닥 축구>는 스페인 마드리드, 2007-2008) 등이 다수가 전시장에서 소개된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한국 현지화 및 구체화의 출발점도 중요하다. 2003년 8월, 윤환이 서울로 이동한 이후 ‘오! 꿈의 작업실’이라는 웹 게시물의 배포와 함께 ‘우발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프로젝트가 ‘우발적’인 이유는 이어진 일련의 사태 때문이다. 사건발생적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이어 예술인회관 점거를 기점으로 또한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시기 한국 사회에서는 다소 생소했던 ‘스쾃’이라는 개념이 현대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으며, 중요한 점은 이 개념을 한국 현실에 맞게 변형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김강과 김윤환의 오아시스 프로젝트 또한 진화적 방식으로 그 형태를 갖춰갔다는 것이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 운동, 도시 공간 투쟁, 행정 주도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비판 등 남한 사회 특유의 문제들과 맞닥뜨리며, 예술의 새로운 운동성을 활성화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 작업을 ‘도시 공간 프로젝트’로 구체화하며, 도시 공간 점거 시리즈로 이어졌다. 이는 인간 중심주의에 기반한 근대성의 환상, 즉 ‘도시’라는 환경과 시스템 속에 내재된 허점과 교착 상태를 설치, 퍼포먼스, 점거, 대중화 등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그 틈을 새롭게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행정아트의 서막
2006년, 윤환은 (사)미술인회의 사무처장을 맡으며 1년 동안 전국 10개 도시에서 오픈스튜디오 네트워크 전시와 작업실 매핑 사업을 추진했다. 전국 규모로 진행된, 실현 불가능해 보였던 이 네트워크 조성 사업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과 의미 있는 성과로 기억되고 있다. 이때부터 김윤환은, 한편으로는 오아시스 속에서 살아남는 수천 개의 촉수를 지닌 생물체 ‘히드라’로,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행정’이라는 구조의 실체를 파헤치고 해체하며 재배치하려는, 숨겨진 이빨을 지닌 괴수 ‘히드라’로 활동하게 된다.
생물체 히드라로서 그는 세계 투어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세계 곳곳에 ‘예술이라는 오아시스’를 조성하려는 기획을 추진했고, 국내에서는 예술가의 작업 공간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삼아 도시 공간의 해방을 논하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2007년 7월에는 문래동에 ‘프로젝트 스페이스 랩39’를, 같은 해 11월에는 ‘예술과 도시사회 연구소’를 설립하며, 이 시기부터 윤환의 활동은 한국의 도시 정책과 예술 정책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행정 아트’라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산호와 피빨린 거머리 사이
2008년, 문래동 오픈스튜디오 페스티벌을 기획하면서 윤환은 서울시 창작공간 추진위원회와 결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보다 멀쩡한 형태의 괴수, 즉 명료한 사고를 바탕으로 실제 행정에 예술가가 개입하는 ‘현실의 행정 아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013년, 통영 강구안 ‘푸른 골목 만들기’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고, 서울 시민청 갤러리에서 《행정아트 in 서울》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열면서, 윤환의 프로젝트는 ‘산호’이자 동시에 ‘피를 빨리는 거머리’처럼 지속되었다.
이 시기 윤환은 공공미술 프로젝트 기획자, 도시 재생 맥락에서의 커뮤니티 아트 사업 단장, 법정 문화도시 사업 단장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는 바다의 산호처럼 너른 터전을 확보해 나가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괴수 히드라가 행정에 피를 빨리는 거머리 신세가 된 시기이기도 했다. 행정은 행복해지고 윤환은 점점 피를 빨려 ‘투명해져 가는’ 형국이었다고 할까.
이때 제작된 오브제들은 일종의 ‘행정아트 굿즈’로 기능했다. DMA Art GOP(2018) 프로젝트에서 제작한 ‘한반도 라면’, 신안군 순례자의 섬(2019) 프로젝트에서 디자인한 예배당 모양의 굿즈, 해양 그랜드 마리오네트(2022–2023) 프로젝트에서 제작한 ‘포항아이’ 등은 친근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형태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행정이 행복했던 만큼, 윤환 역시 이 시기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셈이다.
다시, 투명해지기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모든 피를 빨린 윤환은 다시 투명해졌다. 그리고 포항에서 ‘그림’을 다시 시작했다. 그가 시작한 작업은 세로 3면, 3폭의 작품으로 ‘승천’을 주제로, 만화 형식의 그림이었다. 그러던 중, 윤환은 당시 시국에 ‘화’가 났다. 마치 2000년대 초반, 놀고 있는 예술인회관을 보고 그 쓸모를 찾아내려 했던 때처럼. 2000년대 중반, 국내외 도시의 빈 공간들을 예술적으로 연결해 유영하듯 날카로움을 퍼뜨리던 시기처럼. 그리고 2010년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행정 네트워크에 균열을 내고자 했던 때처럼. 이번에도 윤환은 그림(畵)을 통해 시대적 ‘화’를 다시금 승화시키려 했다.
익숙한 자극, 사방으로 촉수를 뻗게 만들었던 그 느낌은 바로 ‘시국’이라는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윤환은 작업실에서 그리고 있던 3면 3폭화를 잠시 멈추고, ‘기표 드로잉’이라는 새로운 작업에 돌입했다. 수없이 ‘기표’를 찍어 그리고, 다시 찍고 또 그리며 퍼포먼스처럼 밀어붙였다. 여기서 ‘기표 드로잉’의 오브제는 말 그대로 ‘기표’ 그 자체였다.
기표 드로잉전을 마치자마자, 윤환은 자하미술관에서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다. 2025년, 탄생 60주년을 맞은 윤환은 수십 년간 국내외를 넘나들며 체화한 그만의 본능적 ‘세상 유영법’으로 감행할, 새로운 미래 여행을 준비한다. 지구 파티클로서의 존재, 윤환의 작가노트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병희.
그래서 먼지
- 김윤환, 2025년, 5월
우주와 바다속은 본성적으로 같다. 바다속을 유영하는 해파리의 모습은 마치 우주속을 유영하는 성운들을 떠올리게 한다. 별들의 탄생과 죽음은 엔트로피의 증가와 감소에 다름아니고 그렇게 만들어진 우주는 먼지에 불과하다. 먼지들이 우연히 서로를 연결하고 어떤 형태를 이루어 우주속을 유영하며 촉수를 놀리듯,
해파리 히드라는 온갖 모양의 촉수를 흐느적거리며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먹고 먹히고 합쳐지고 분리되면서 사건을 만든다. 아! 히드라 말미잘 해파리 산호.. 크니다리아 이놈들은 얼마나 사고뭉치들인가. 또 나는 우연히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결국 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