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미술관은 12월 3일(금)부터 12월 26일(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중견작가전 《COUNTDOWN 2021》에 참여한다. 자하미술관은 류준화 작가와 함께 <Ritual Table - 33人의 여성들>을 기획하여 중견의 위치를 다듬어가는 류준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고자 한다.
중견작가전은 한국 미술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중견작가들을 집중 조명하고자 마련된 세종문화회관의 기획전시 시리즈로, 그 세 번째 전시인 올해 《COUNTDOWN 2021》은 서울특별시미술관협의회의 추천을 거쳐 최종 선정된 중견작가 8인을 소개한다. 김범수, 김홍식, 류준화, 송윤주, 이상현, 이세경, 전윤정, 홍장오 작가는 20년 이상의 활동 기간 동안 저마다의 매체와 기법 실험을 거듭하며 8인 8색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런 만큼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100여 점의 작품들은 주제, 소재, 재료, 기법 등 모든 면에서 다채로운 독창성을 자랑한다. 전시는 작가별로 한 섹션씩 총 8개 섹션과 한 개의 아카이브 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12월, 이번 전시가 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시명 “COUNTDOWN”에 담았다.
전시 구성
1. 김범수 X 사비나미술관, Beyond Description 서술을 넘어
2. 전윤정 X (재)한원미술관, 블랙 앙상블(Black Ensemble)
3. 홍장오 X 성북구립미술관, 루시(LUCY)
4. 이상현 X 토탈미술관, 조선 신연애
5. 김홍식 X 코리아나미술관, 이접하는 장소들 : 광장, 미술관, 관람객
6. 이세경 X 성곡미술관, Hair on the Carpet 카펫 위의 머리카락
7. 송윤주 X OCI미술관, 달고나 쪼는 여자
8. 류준화 X 자하미술관, Ritual Table - 33人의 여성들
+ 아카이브 룸 : 작가별 인터뷰, 심화 텍스트, 도록, 엽서 등
자하미술관 X 류준화
Ritual Table - 33人의 여성들
전시서문
유정민
생각해보면 여성을 두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인류역사적 기록들에 대한 의심과 반문을 감히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항상 슈퍼히어로는 남자였고, 독립투사도 남자였고, 한 집안의 제사를 모시는 이도 당연히 남자였다. 원더우먼과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늘 익숙했고 제사상을 차리는 이들도 사실 여자였지만 여자인 본인조차도 세상이 그랬듯 선뜻 수긍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류준화가 보여주는 작업 속 이야기들은 여성도 그 역사 속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준다.
작가 류준화는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소녀, 새, 물, 꽃 등의 소재들이 그녀의 작품 속 이야기를 이끌어왔으며 샤머니즘과 설화적 배경 안에서 마치 수줍고 어여쁜 화풍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그림 속 마주하게 되는 소녀들의 단상은 처절하고 무섭고 서글프며 경이롭다. 날개가 없는 소녀가 하늘을 날기 위해 새에게 살점을 내어 주고, 날개가 달린 새의 모습도 되었다가 꽃의 날개를 피우기도 한다. 그리고 소녀는 소녀를 버린 부모를 구원하기 위해 본인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혈흔 같은 붉은 꽃이 가득한 물에서 마치 여신처럼 유영하고 홀로 유유자적 하얀 배를 타고 강 위를 건넌다. 마치 내가, 나의 어머니가, 한 여성이 세상에 태어나서 겪어야 했던 무조건적인 강요와 희생처럼 혹은 온전히 누리고자 했던 욕구와 한 평생의 모습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보여주고 있다.
류준화는 소녀에서 그 주체를 ‘신여성’으로 옮겨와 새롭게 집중하고자 했다. 이번 33人의 작품 속 모습들은 1919년 3.1운동에 동원되었던, 하지만 몇 명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생소한 그녀들이다. 유학당의 여성들, 간호사들, 알려지지 않은 기생들 그리고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수감이 되면서 남아있던 이름들은 나라를 위해 한마음로 독립을 외쳤던 분명한 여성독립운동가들 이라는 것이다. 항상 독립운동가를 언급할 때 남성들에 초점이 맞춰져있고 역사적인 기록도 대부분이 남성들로 구성이 되어있지만 그 자리에는 분명히 여성운동가들도 함께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그녀들은 여성이 멸시받던 당시의 분위기속에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그 여성들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혹은 우리 여자들도 이 땅에 있다고 가부장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듯 폭탄을 던지고 거리에서 만세를 외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며 처절하게 싸웠다. 하지만 남성들을 위한 국가와 역사는 그녀들의 이름을 지웠고 여성독립운동가 라는 단어는 낯설기만 하다. 그렇게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류준화의 그림 속 33人의 얼굴과 이름들은 믿기지 않을 다양한 나이대와 여리고도 강인함이 묻어나오는 눈빛과 표정들로 애잔한 마음이 일렁거린다. 류준화의 작품 중 바리데기 신화 속 소녀가 본인을 버린 부모를 살리는 이야기는 그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여성운동가들과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소녀의 형상은 사라졌지만 그녀들 모두 한 여성이 아름다운 꽃처럼 피고 지는 세월동안 마땅히 누려야 할 숙명과도 같은 비극을 보여주는 듯하다.
류준화는 그녀들을 위해 제사상을 차렸다. 그녀들이 주인공이고 그녀들을 기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림속의 제사상은 열로 구성되는 고기, 생선, 과일, 국, 밥 등의 일반적인 유교적 제사상과는 조금 다를 뿐 아니라 다소 엉뚱하고도 개인적인 추억과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특별한 추모의 차림 방식이 눈에 띈다. 와인, 커피, 실타래. 계란과 참외, 화분 등이 상 위에 자리하고 있고 배치 또한 들쭉날쭉 마음 가는 데로 놓았다. 그녀들의 사진들과 어느 기억의 풍경 이미지, 그리고 여러 권의 책들의 등장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데 마치 먹고 싶은 음식과 좋아하는 물건, 소중한 기억들을 모아 모아서 어디론가 훌쩍 소풍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그녀를 위한 테이블’에는 매번 여자의 몫으로 돌아오는 형식만 남은 제사상 차리기에서 벗어나 그 누구의 희생, 노고 따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온전히 그녀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억과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들을 추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테이블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마치 상을 앞에 두고 내가 사랑했던 그녀들과 한바탕 신나게 수다를 떨다온 것 같은 특별한 감정이 스며든다.
류준화는 여성에 대한 문제와 고민을 끊임없이 작업을 통해 보여주었지만 그 안에는 여성을 넘어서 한 인간이 감당하고 버텨야만 했던 부당함과 차별, 심신을 공격하는 폭력들, 강요되는 역할, 기약 없는 기다림 등의 현 시대의 모습을 동시에 내포한다.
삶의 어느 날 깊은 상실감이 밀려올 때, 류준화의 작품 속 그녀들의 그 단단함은 따스한 위로가 될 수 있음에 나 자신을 좀 더 힘껏 안아 줄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작가노트
류준화
나의 제단은 식탁이기도, 책상이기도, 선반이기도 하다.
음식들을 차리거나, 책상 위를 정리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선반위에 올려놓거나 할 때 마다 마치 나만의 신을 향한 제를 올리는 것 같다.
시공간이 다른 사물들을 주관적 시점으로 테이블위에 배치하고 내 안의 신들을 불러본다.
내가 불러낸 신들은 엄마였고 할머니였고, 바리데기 소녀이기도 하였으며,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다.
신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 이름 없던 수많은 여성들이 내게 말을 걸고, 눈물 한 움쿰 쏟게 했던 역사 속 사라진 여성들이 나의 테이블로 와 주었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운동의 현장에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되는 여성들을 나의 테이블로 초대했다. 신교육의 세례를 받은 여성들의 첫 등장이라고 할까?
3.1운동 이후 처절하고 치열했던 그녀들의 삶은 나를 부끄럽게도 하고 가슴 뜨겁게도 했다.
나는 그녀들을 위해 제를 올리고, 그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내가 아직 모르는 그녀들을 만나러 긴 여행을 떠날 것 같다. 그리고 나의 테이블에서 그녀들과 함께 끝나지 않을 긴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