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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 우연》

2021년 12월 4일 - 12월 26일

주최 및 주관: 자하미술관

전시기간: 2021년 12월 4일 - 12월 26일

(12월 25일은 휴관입니다.)

오 프 닝: 오프닝은 따로 없습니다.

전시장소: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46 자하미술관

참여작가: 권세진, 기민정, 이세준, 이현배, 이희준, 표영실

​​전시기획: 이수연, 박주하

전시글: 백숙영

전시진행: 이수연, 박주하

후원: 서울특별시

 
 

기획의 글


이수연


1990년대 이후, 전통적인 매체와 장르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다원예술을 지나 메타버스, NFT, VR,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기술과의 접목이 화두인 2021년, 현대미술의 외연은 확장하고 있다. 이렇게 탈장르화가 진행되는 시대에 회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20세기 이후 회화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은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1980년대 초, 사진의 등장과 더불어 광고, 영화,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에 이미지를 조합하는 작품이 출현함에 따라, 미술평론가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 1944~2019)는 “회화의 종말”을 주장하였다. 이후 1910년대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1968) 역시 복제와 차용 개념을 등장시켜 미술과 실재 사이에 문제를 제기하며, 회화의 위기를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회화에 대한 위기를 ‘선고’하는 것은 그것으로 그쳤을 뿐, 회화는 2021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아서 단토(Arthur C. Danto, 1924~2013)가 선언했던 “예술의 종말”이 예술의 끝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듯이, 꾸준히 제기되었던 ‘회화의 위기’론 역시 글자 그대로 회화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회화 작가 6인(권세진, 기민정, 이세준, 이현배, 이희준, 표영실)의 작업을 통해 지금 시대에서 회화가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질문하고자 한다. 6명의 작가는 우연적인 효과에 입각한 표현 기법과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우연한 순간과 감정, 그리고 풍경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회화의 확장을 탐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도적 우연≫은 의도와 우연이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며, 상호 개입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6명의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회화의 일면에 주목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에서의 우연성을 작가의 의도와 만나는 교차점으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철저한 계획 하에 작업을 진행하더라도 그 안에서 우연한 시간은 있으며, 이것은 작업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우연이 만들어내는 순간이 작업에 결과로 반영되는 것은 회화 뿐 아니라 조각, 사진, 영상, 설치와 같은 다른 매체에서도 동일하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에서의 의도와 우연에 주목할 것이다. 그 이유는 회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논의되었던 거대서사, 즉 담론과 이론이 아닌 작가 개인에게 회화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작업과정에서 의도와 우연 가운데 내린 작가의 결정들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회화를 조망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의 일상과 작업과정 속에서 마주하는 우연한 순간을 포착하는 회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의도된 풍경


백숙영 

회화는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변화된 관계를 지각하고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변모하며, 회화 본질을 탐구해왔다. 동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과 주관적인 예술 감성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지속적으로 회화의 가능성과 확장을 모색해왔다.

회화에서 손으로 그리는 행위에 의해 구현되는 형상은 가장 기초적이며 근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예술적 노동의 결과물로, 형상과 비형상의 틀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 회화의 본질을 드러낸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급변하는 새로운 문화예술 양상 속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으로 구현한 의도적 풍경을 제시하고 실체와 인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가 6명의 작품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적 사유와 현실을 재인식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다시금 회화의 가치를 환기하여 회화적 확장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권세진 작가는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풍경을 관찰하고 사진으로 기록하여 그때의 감정을 복기하는 방식으로 실재 풍경을 기록한다. 작가의 환경적, 시간적 요인에 의해 작업방식을 설정하여 사진으로 기록한 풍경을 여러 개의 그리드로 나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조각으로 각각 그린 후 펼쳐내어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로 구성한다.

화면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의 크기는 10x10cm로, 작가가 재료의 물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화면에 집중하여 완성할 수 있는 물리적인 크기로, 재료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농담과 채도를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재료와 기법의 여러 연구를 통해 이러한 최적의 조건을 설정하고 작은 화면 하나에만 오롯이 집중하여 붓질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조각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렇게 완성된 조각 그림은 예술적 사유의 결과물로서의 개별성을 가지고, 독립적인 깊이감과 고유의 시간성을 지닌 개체가 된다. 이들을 펼쳐 하나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형식은 재현된 풍경이지만 겹겹이 쌓여있는 흔적들은 일련의 사유와 수행에 의해 축적된 시간이며, 단순한 형상을 뛰어넘는 예술적 풍경으로 환원되며 새로운 예술적 감상을 유도한다.


기민정 작가는 물질과 인격의 이중성, 양극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관계와 현상을 회화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상반되는 요소들이 공존할 때 발생되는 충돌과 균형의 간극에서 오는 예민한 감각들을 문학적 동기와 재료 물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실험적인 회화방식을 시도한다.

작가는 회화에서의 양극적 요소와 유사한 문학적 구성을 가진 소설에서 기인한 문학적 동기와 결합해, 양극성을 가진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여 다양한 인격의 행위자로서 제스처를 취한다. 자유로운 제스처의 흔적은 또 다른 인격을 입은 작가의 행위에 의해 정리되고 규정되어진다. 작가의 양극을 오가는 회화적 제스처는 매우 본질적이면서도 사회적이라 할 수 있으며, 유용성과 상징성을 지닌 회화 형태로 드러난다. 작가의 다층적인 회화표현은 상이한 재료적 물성으로 발현하는데, 작가의 자유로운 제스처의 흔적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화선지의 연약함과 양면적인 재료의 특성을 이용해 다양한 색채로 자유로운 제스처의 흔적을 담고, 그 위에 밀도나 무게감이 전혀 다른 재료로 윤곽을 그리거나 프레임을 그리는 등, 화면을 정비하고 규정한다. 또한 화선지의 연약하고 이중적인 성질을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상이한 두 요소를 병치하고 대조한다.


이세준 작가의 회화방식은 자신이 속한 세계관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 사유의 여정으로, 다시각의 감정의 공유와 대립, 사소한 경험의 거시적인 스케일의 전환, 타인의 경험과 감각의 예술적 개입 등의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예술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작가는 본인의 기존 작업 또는 사진에서 출발한 그림에서 이미지의 다양한 요소들을 해체하고 다듬는 과정을 거쳐 추상과 구상의 이미지를 획득하거나, 실재 대상의 일부를 확대하고 재현하여 방법적으로는 구상이나 표면적으로는 추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그리고 배치하는 방식으로 온전히 재현이면서도 추상적인 화면을 완성하고자 한다. 또한 사소한 일상의 한 장면이 우주적이고 거대하게 확장되기를 바라며 일상 풍경에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영화에서 클리셰를 빌려와 이미지를 만들어 배치하고, 타인의 시각으로 기록된 풍경을 작가의 감각과 상상력으로 재구현해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타인의 감각을 작가의 주관적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이는 감상자에게 다시 전도되어지는 반복적인 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는 작가 특유의 회화적 제스처의 흔적들과 재료의 질감, 수많은 화려한 색의 향연들이 더해져 새로운 판타지 풍경을 보여준다.


이현배 작가는 “작품마다 다다라야 할 답이 있다고 믿으며, 완성되어야 할 모습에 가깝도록 도와주고 필요 없는 부분을 걷어내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다.”라고 말한다.

예술가의 오랜 사유와 연구를 통해 축적된 예술적 즉흥성과 직관에 따른 행위가 진짜 이미지이기를 바라는 작가는 자연의 유기적이고 불완전한 요소와 추상적인 패턴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미적 감각을 찾아 캔버스 위에 즉흥적인 “칠”을 하고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작가에게 “칠”은 가장 감각적이고 즐거운 과정으로, 예술적 직관에 의해 즉흥적이고, 자연스럽게 움직여지는 행위로 고도의 집중력으로 행해진 붓질은 섬세하고 부드럽게 때로는 집요하고 폭력적인 제스처의 생생한 흔적을 남긴다. 배경과 대상의 구분 없이 마구 뒤섞인 이미지는 작가의 선택적 개입으로 실재하는 추상이 된다. 선택적으로 다시 붓질을 쌓고, 다듬어내는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작품마다 독립된 개별성과 생명력을 부여하여 완성한다.

이현배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무엇으로 정형화하기를 원치 않는다. 작가의 직관적 몰입에 의해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필연적 형태를 부여받은 개별성을 가진 자율적 실체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회화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희준 작가는 일상에서 공유되어지는 명확하지 않은 감각들을 시각화하고자 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경험한 불분명하고 특정할 수 없는 다양한 감각들을 회화의 영역 안에서 시각화하는 과정으로, 실제로 경험하고 기록한 공간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기하학적 색면 추상 이미지로 전환하는 방식을 취한다.

핸드폰에 기록되어 있는 일상 공간의 사진을 흑백으로 편집해 캔버스 위에 재현하고, 물감을 칠해 이미지의 일부를 가리거나 부분적으로 지워 부수적이고 파편적인 요소로 전환시킨다. 감각의 기억은 추상적 회화언어의 방식으로 단순한 형태와 물질로 전환되어 기하학적인 도형과 색면으로 표현되어 지는데, 화면을 구성하는 직선과 곡선의 단순한 도형과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려 물성 자체의 질감을 드러내는 색면은 공간을 분할하고 가리고, 드러내는 기능적인 요소로서 새로운 영역으로의 인식의 전환과 확장을 유도한다.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회화의 성질은 불분명한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일상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감각에 주목하며, 사진과 회화를 매개로 재현에서 추상으로의 인식 전환을 통한 예술적 시각화를 시도한다.


표영실 작가는 오랜 예술적 습관으로 이뤄진 습득방식을 통해 수집되어진 감정과 사념들을 표현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포함해 전반적인 사회적 현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외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과 사념들을 포착해 본인만의 회화적 언어를 통해 형태를 구성하고 실재화한다.

작가가 포착하는 대상은 작가적 감수성에 의해 채택되어진 내면의 감상들로, 모호하거나 외면되어진 형태 없는 마음은 작가의 일련의 사유 과정을 거쳐 물질성을 부여받으며 하나의 형태를 띠게 된다. 화면에 그려진 형상은 예민하고 섬세한 선과 면으로 채워져, 실재하나 그 형태가 모호하고 무엇으로 구체화하기 어렵다. 작가의 예민하고 예리한 붓질로 이뤄진 형상은 단순한 도형들로 조합되고 겹쳐져 있거나,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비어있기도 하다. 작가는 “정서의 시각에서 기인한 시각언어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또렷하고 쓰라린, 실감 나는 마음의 난해함을 전달한다”라고 한다. 모호하지만 또렷한 표상의 덩어리들은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