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경 개인전
<메타만다라>
2021년 10월 1일 - 10월 24일
주최 및 주관: 자하미술관
전시기간: 2021년 10월 1일 - 10월 24일
오 프 닝: 오프닝은 따로 없습니다.
전시장소: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46 자하미술관
참여작가: 전인경
전시 서문
팬데믹 시대, 컬러플 만다라
심상용(서울대학교 교수/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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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전인경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인류를 걸어 넘어트린 덫, 문명의 훼방꾼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서사를 도상학적으로 풀어내는 야심만만한 연작이다. 조형성의 기조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생각이 깊어진 것만큼은 확연히 드러난다. 정방형 캔버스의 4면을 둘러싼 사방문(四方紋)의 등장이 먼저 그러한 인상을 준다. 사방문은 만다라 미학에서 차용한 것으로, 성과 속을 구분하는 기제였다.
전인경 회화의 고유한 조형체계가 강렬한 색에 얹혀진 채 쇄도해온다. <바이러스의 공간과 시간>(2021)은 마치 세폭 제단화의 상징성을 부여하려는 듯,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내용을 세 개의 캔버스에 나누어 담긴다. 이 만다라 세상에선 한낱 바이러스에도 나름의 미와 위엄이 허용된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망각이 아니라면, ‘별과 바이러스와 인간’은 모두, 의심의 여지 없이 형제요 따라서 동등체이다. 인간과 바이러스의 관계는 악(惡)과 일방적 희생 같은 일방향의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백신이 이 병든 문명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듯, 바이러스가 퇴치해야 하는 괴물인 것도 아니다. 2020년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이지 않는 적” 으로 간주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동안 사재기, 온라인 통신, 다양한 사회적 제재들을 통해 일상을 마치 군사 캠프와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이 기간 미국 사회에서 미디어의 선전적인 위력(propaganda power)은 매우 완강한 것이 되었다. 문제적인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탐욕과 야심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 퇴치 이전에 경청이어야 한다.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는 것, 인간과 바이러스의 ‘적대적 공생관계(antagonistic cooperation)’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전인경의 만다라 회화론에 부합하는 시대정신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이러스의 공간과 시간>의 세폭 회화에서 각각의 바이러스가 노란색과 빨간색, 파란색의 신체를 입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살아있고 역동하는 많은 조형적 요인들에도 정교한 회화적 질서는 흔들림이 없다. 리듬은 마치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이다. 이 안정적인 리듬이 강렬한 채색의 분방함을 적절하게 조율한다. 이 리듬에 의해, 이 세계는 예컨대 최근에 그린 바이러스 이미지처럼 그 형태의 재현성이 분명한 경우에도 일러스트레이션을 넘어서는 순도 높은 회화성을 획득한다. 사실 이 조율된 내적, 외적 리듬감이 회화성이라는 미적 가치를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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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경의 만다라의 미학 안에서는 모든 폭력의 전조증상인 피아(彼我)의 구분이 무색하다. 미와 추의 분열, 천과 귀의 계층적 구분, 자연과 문명, 동양과 서양, 유색인과 백인, 문명과 야만, 전통과 현대, 남자와 여자의 분리, 이 모든 이분법의 자리는 이 미학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만다라는 어느 하나도 무의미한 것이 없으며 각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상호연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성찰하는 예술이다.”(전인경) 여기서 만다라는 더는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미학도 그것의 세속화된 탐미의 범주로만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회화는 교환이고 사건이다. 영적인 것은 형태와 색을 옷 입고, 형태와 색은 지난 근대기의 망각을 딛고 정신과 가치의 차원을 스스로 복원하는 교환이다. 여기서 만다라의 영성(靈性)은 시각적 조형성으로 기꺼이 번역되고, 예술은 다시 초월계의 호출 우주의 부름에 귀와 마음을 연다.
전인경은 이 재회의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만다라> 연작에 임해 왔다. 그리고 최근 그의 만다라 회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실험인 <메타 만다라>로의 나아감을 준비 중이다. 만다라 미학의 근간에서 보면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되었듯, 그-만다라 미학- 자체가 이미 기존 회화론의 경계 허물기며 교환이고, 공존과 상호호혜의 융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메타 만다라의 미적 융합은 이번에는 디지털 기술, 가상현실까지 그 영역을 넓힌다는 의미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러한 행보는 최근 ‘디지털 페인팅’ 또는 ‘디지털 코드 페인팅’으로 명명할 수 있을 듯한 실험의 결과물을 보여주어 온, 독특한 경력의 이주행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구현되었다.
디지털 코드 페인팅은 수백, 수천 장씩 스스로를 복제해내며, 벨기에의 화가 뤽 튀망(Luc Tuymans. 1958~ )이 말했던 “정말로 좋은 그림은 암기하는 것조차 거부한다”를 비웃는다. 그럼에도 전인경이 메타 만다라, 초월적 만다라로 명명하는 그 미학은 가능성과 비웃음 사이를 초연히 지나면서, 지금껏 ‘붓의 운행’을 신화화하는 전통적인 회화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성찰에 몸을 맡긴다. 작가는 이제 전통적인 운필의 회화론이 구획해온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싶어한다. 경계를 넘어 자유하기, 그것이 만다라 미학의 더 깊은 심해를 유영하는 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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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몸뚱이에서 사리가 나오도록 수련을 거듭해도 녹록치가 않은, 만다라는 결코 미학 문법으로 풀어내기에 녹록치 않은 수준의 주제다. 세속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에게 깨달음은 영적 향수요 의지적 지향일 수 있어도, 그 완성형은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깨달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깊은 학습은 그 불구성의 일부를 보완하는 많지 않은 수단 가운데 하나다. 전인경은 요즈음의 작가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미덕인 성실한 학습과 자기성찰을 통해 인간의 몸과 정신에 대한 사유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서 왔다. 원자에서 초신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간의 홍체에서 초신성의 폭발에 이르기까지, 긴 스펙트럼을 오가면서 프랙탈 우주론, 존재와 우주의 도상학적 유사성 등, 여정의 흥미진진한 기록을 회화라는 도상학적 결정체로 남긴다.
그럼에도 작가가 인용한 바 있는 20세기 초 신경과학자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ón y Cajal)의 다음의 말을 전향적으로 곱씹어보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신경세포는 수 많은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과 유사해서,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펴서 매일 더 많은 꽃과 과일을 맺는다.” 하지만, 비유는 앞과 뒤를 바꿀 때 더 훨씬 더 조형미학적으로 잠재력을 지닌 진술이 된다. 즉 많은 꽃과 과일이 맺히고 소멸하는 것을 볼(seeing) 때, 실은 우리는 우주의 생성과 마주하는(facing) 것이고, 마주하는 것은 결단코 그것을 가장 잘 아는(knowing) 방법인 것이다.(Seeing is Facing. Facing is Knowing).
전인경의 회화에 다가서기 위해 핵융합과 초신성 폭발, 인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을의 맑은 대기와 높아진 하늘과 마주하고, 가슴 깊이 초대해 들이는 것은 원소와 초신성 폭발과 성운들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주어지는 미학적 특권이다. 즉, 만다라가 우리로 보게 만드는 만큼이나, 보는 자체가 우리를 만다라의 초입으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무려 31년(1977-2008) 동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을 역임했던 필립 몬테벨로(Philippe Montebellow)가 고전 미술사의 빛나는 작품들과 마주하며 했던 말을 생각난다. “위대한 시대의 작품은 우리를 매혹하고 잃어버린 문명 가까이로 데려갑니다.” 위대한 시대는 “물질을 넘어 정신적인 가치로 나아간 시대”다.
이것이 다시금 절실히 필요한, 전인경의 회화가 그 염원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만다라 시대의 도래, 그 미학의 복원이다. 포스트 휴먼을 노랫말처럼 입에 달고 사는 이 시대이기에, 만다라 미학은 그리 탐탁치 않은 고전극으로의 회귀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원이라는 거울 없는 탐색과 발견은 한계가 명백한 일일 뿐이다. 뿌리를 잊은 문명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게임은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전인경을 따라, 뭉글거리는 생명의 입자들, 질서정연한 원소들의 향연, 코로나 바이러스도 형제가 되는 형형색색의 우주로 초대되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그렇다.
작가 노트
실재와 가상의 공존을 구현하는 <메타만다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 문화가 일상이 되었고, 개인은 디지털 세상에서 소통한다. 우리는 이미 디지털 세상에서 이미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기에 새삼스러운 것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 변화의 속도는 매우 놀랍다. 아날로그형 인간 중의 한 사람인 나는 늘 정신적인 것과 내면의 균형을 추구해오고 인간과 사물의 본질에 대한 관심으로 만다라라는 주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의 근원은 결국 원자의 세계이다. 그 작은 입자들이 생기고, 붙고, 떨어지고, 부딪히고, 깨지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 생명도 되고 사물도 된다.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가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생성과 순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경이로움에 한없이 작아지고 모든 것은 특별한 것이 없는 듯하다.
나의 그림이 검은 바탕을 한 이유는 암흑물질과 일반물질이 존재하는 우주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검은 색으로 여러 번 칠을 올려서 깊은 어두움을 나타낸 뒤 그 위에 별의 먼지인 성운을 투명하게 그리는 동시에 원자와 세포 이미지를 그려 넣음으로써, 우주 생성과 생명의 탄생을 담은 만다라는 표현하고자 했다.
동아시아 전통은 우주를 오방색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발아와 생성, 순환 등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서 전통회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그림에서 오방색은 가장 근본적인 조형적 요소이다. 나아가 우주를 표현하려는 나의 주제에 있어서도 오방색은 색 자체로서 우주적 메시지를 담은 핵심이다.
나의 그림에 들어있는 성운 이미지는 우주 공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천문학적인 우주만이 아니라 우주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나아가 내 그림 속의 성운 이미지는 세포 이미지와 닮았다. 부분적인 요소인 먼지와 세포 이미지가 우주 전체를 상징하듯, 우주 전체는 먼지와 세포로 연결된다. 따라서 내 그림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우주적 세계관이다.
이러한 원자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모든 우주 만물의 생성, 순환, 탄생, 죽음 등에 관한 우주적 사유로 연결된다. 소우주인 인간의 뇌세포에서 저 무궁한 우주의 별의 탄생 등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과학 분야를 향해 나의 관심이 넓어지고 있다. 급기야 과학의 첨단에 서 있는 인공지능 분야와 만남을 갖게 되어 컴퓨터공학자이자 예술가인 이주행 박사와 협업을 하게 되었다.
종교적 영성을 현대미술과 접목하면서 시작한 나의 만다라 작업은 우주론적 세계관에 관한 호기심과 탐구 과정에서 과학과 예술의 융합으로 확장해왔다. 이러한 흐름에서 인공지능 연구자로서 디지털코딩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주행 박사와 만나 협업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만남의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디지털인과 아날로그인의 만남
2) 디지털 작품과 물리적 작품의 협업
3) 가상현실과 실재의 조화
나는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 붓으로 그림을 그려왔다. 그리고 상상해왔다. 물리적 시간과 한계 때문에 펼쳐보지 못한 부분을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확장시킬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우리가 핸드폰으로 많은 것을 해결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되듯이 말이다. 극과 극은 언젠간 만난다고 했다. 디지털의 작품과 아날로그의 작품이 하나로 탄생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것은 교집합일까 합집합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전인경과 이주행의 협업이 이뤄졌다.
나의 아날로그 만다라 그림은 디지털 코드페인팅을 하는 이주행 박사와의 협업을 거치면서 디지털 만다라로 확장하여 아날로그와 디지털 만다라의 공존을 통하여 메타만다라 개념과 예술이 완성되었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공존, 과학과 예술의 융합, 실재와 가상현실의 조화를 통하여 기존의 만다라를 새롭게 해석한 메타만다라의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메타(Meta)라는 용어는 ‘초월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메타만다라>는 만다라는 넘어서는 초원적인 만다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작업해온 만다라 연작들에 대한 메타적인(초월적인) 개념을 가지며, 메타만다라 개념을 통하여 나의 작업은 아날라그이자 디지털이며, 실재이자 가상이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함께 존재하는 조화와 균형의 예술로 거듭난다고 생각한다.
* P.S. 사방문(四方紋)의 의미
1. 만다라를 그릴 때 성과 속의 영역 구분을 지었던 사방문 이미지를 <바이러스의 공간과 시간>(2021)이라는 작품에 차용했다. 그 이유는 혼탁한 세상과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연 (바이러스의 공간)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지 말자는 의미였다.
2. 메타만다라에서 사방문의 이미지도 역시 자연과 인간의 영역 구분을 하자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메타버스 시대에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소통으로 경계를 넘나들자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