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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미술비평)
아이들은 똥 얘기하면 예나 지금이나 까르르 한다. 미우나 고우나 가난하나 부유하나 상관없이 제 몸에서 나온 똥이란 활짝 즐거운 것이다. 한창 ‘응가’ 하는 시기에는 배변기 위에서 힘 주느라 더러 인상쓰고 괴로워도 하지만, 볼일 마친 후에는 근사한 똥 덩어리 하나 내려다보면서는 연신 웃는다. 이 웃음에는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똥에서 처음에는 열대과일 망고의 향도 나고 점점 어른 똥에 가까워지면서는 쫑긋한 꼭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저기 저 하얼빈의 잘생긴 만두 같은 위엄도 생겨난다. 이 똥의 감각으로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한꺼번에 여섯 개 이상의 다중적인 캐릭터로 놀이를 즐긴다. 이 똥의 감각은 예술가들에게 전이되었을 때, 비로소 예술가가 눟는 – 이 “눟다”라는 동사 – 똥에서도 남다른 놀이감각이 피어난다.
<똥이 꽃이 되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살이에서 아이쩍 가졌던 똥의 감각을 회복하려는 지렛대를 갖고서 까르르 웃음의 원초성, 똥 만지는 그 몰캉한 촉각, 똥 덩어리의 우상파괴적 성향, 짱돌 대신에 고공에서 던지는 똥의 저항, 똥이 거름으로 변하면서 생명순환이 이루어지는 위엄 그리고 기후가 변화하는 시기의 똥 생태적 비전 같은 것들이 어우러지려고 하는 자의반타의반의 전시이다. 왜 자의반타의반인가 하면, 아무래도 똥이란 아무리 눟고 싶다고 해서 눟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어우러지려고 하는 것들, 다소 거창한 것들이 웃음꽃처럼 피어나기 위해서는 또한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똥 덩어리가 “서름” 따위는 모르는 “질거운 꽃숭어리”가 되기까지에는 남모르는 저 아래로부터의 여정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또한 똥의 서사를 따르며, 이 전시에 도입된 그러한 똥의 서사의 일단을 이렇게 열어보이면 어떨까.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하느님은 똥을 눟는가” 라는 재미난 질문을 던진다고 주재환 작가는 2013년 경기창작센터에 머무르던 내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셨다. 하느님과 똥이라.. 이는 쉽게 연결짓기 힘든 아이들의 감각인데, 쿤데라는 “똥은 악[惡]의 문제보다 더 골치아픈 신학문제이다” 라고 전제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똥을 눟고자 한다면, 하느님에게 “창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위 “하느님의 창자”라는 기이한 실재 혹은 메타포가 등장한다. 이 창자에서도 보리밥과 고구마 먹은 후 쿠르륵 쿠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이는 영락없이 수운 선생이 만났던 그 하늘님일 것이다. 수운 선생은 저 하늘의 지고한 신인 동시에 옆자리의 가까운 술친구, 가부장제 하의 여성, 그리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 아이가 무한히 합쳐진 콜렉티브 아이덴티티로서의 하늘님을 접했다. 이윽고 내놓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하느님은 똥을 눟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답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은 세상 저 위 높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보좌 밑으로부터 거대한 똥 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조각내고 대성당의 벽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칼 구스타프 융)
대단한 환상가 융에게도 “하느님의 창자”가 당연히 있는데, 이 창자로부터 쏟아지는 똥 덩어리는 지저스 사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지어지고 그 후예들에 의해 제도화된 대성당, 가령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 고딕 양식의 대성당 같은 데를 덮치면서 모조리 쨍그랑 와장창 터져나간다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압도적으로 도깨비 장난과도 같은 우상파괴적인 스펙터클인데, 이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지저스가 연출해낸 그 적나라한 –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날 버리시니까?” – 퍼포먼스, 체스터튼과 지젝에 따르면 “무신론자로서의 신”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통해 미래에 닥쳐올 우상이자 제도로서의 교회를 미리 파괴하는 것과 맞먹는 환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는 서구사상이 늘 상상해온 폐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비로소 즐거운 생성이기도 한 것이어서, 융에게는 <똥이 꽃이 되는 세상>과 같이 생명이 순환하는 ‘그림자’로 ‘똥 덩어리’를 자리매김시켰다. 수백일을 골리앗 기중기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면서 자신이 싼 똥을 말렸다가 올라오는 전경들에게 던졌다는 김진숙 위원의 저항의 무기로서 똥 역시 굉장한 파괴력을 지녔다. 동시에 존재의 위엄과 ‘그림자’를 온몸으로 보여줬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지저스가 그 당대의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사는 저 바닥세상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병과 귀신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다가가 “긍휼히 여기셨다”라는 구절을 남기는 부분마다 그 ‘긍휼’[矜恤]이란 것이 실제로는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팠다”라는 뜻이었다. “신의 창자가 아팠다” “신의 뜻은 창자에 깃들어 있었다” 라는 성서의 구절들은 “하느님의 창자”를 전제로 한 신체적 표현이었다. 사람의 아들 역시 엄연한 사람 몸을 지녔으므로 이 긍휼과 함께 아이들의 까르르 까르르 하는 똥의 감각에는 익숙한 편이었을 것이다. 물론 쿤데라는 “똥에 대한 책임은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라고 쏘아붙이면서도 자신이 지나치게 신성모독을 범했다고 생각했는, “하느님에게는 창자가 없다”라고 슬그머니 결론짓지만, 이는 (똥 푸는 사람을 높여서 부르는) 소위 ‘예덕선생’(박지원)의 목소리가 담긴 복음에 깜깜 무지한 소설가의 소치다.
창자는 말이 없지만, 제2의 뇌로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호르몬 세로토닌을 95% 이상 만들어내는 기관이다. 행복한 뇌로서의 창자, 여기서 의미심장하게도(!) 똥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이들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들인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아이들에게 똥 덩어리가 웃음 덩어리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는 지금까지 ‘뇌’와 ‘가슴’을 연결지어서 “머리가 아니고 가슴으로 받아들여라”라는 수행적인 당부가 최고의 충고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머리를 쓸 때 쓰더라도 창자의 호흡, 창자의 리듬으로 하라” 라는 것이 마침내 환히 밝혀진 진실이기 때문이다. 창자는 또는 사람 몸과 미생물의 집단지혜가 끊임없이 상호교섭하는 장소이며, 심지어 저 바깥의 미생물 집단과 이 창자의 미생물 집단이 서로 대화하는 장소이기도 하단다.(<더 커넥션> 중에서) 너무나 열려진 커뮤니케이션 체제로서 활수한 결과물이 바로 똥, 똥 덩어리인 셈이다. 이처럼 <똥이 꽃이 되는 세상> 전시는 다시 말해서 똥을 꽃처럼 피우는 창자 네트워크의 전시, 창자 커뮤니케이션의 전시이다.
권정생의 <강아지 똥>은 한술 더 뜬다. 수운 선생의 콜렉티브 아이덴티티는 그래도 사람 주위에서 결국 “귀신까지 나다” 라고 크게 포괄하셨지만, 이 동화는 “강아지의 창자”까지 접수한다. 강아지도 “하느님의 똥”을 눟는가. 이것이 권정생의 소박한 질문이자 이번 전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나아가 이런 질문. 강아지가 “하느님의 똥”을 눟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똥”인 줄 아는가. <똥이 꽃이 되는 전시>의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이제 강아지가 눟은 똥 덩어리 하나에게 의식이 반짝 한다. 쓸데없는 개똥이라고, 더러운 똥이라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천대받는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바람에 스치우듯 ‘그리운 별의 씨앗’을 이윽고 가슴에 심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다. 이때 바닥에 역시 뒹굴고 있던 웬 씨앗 하나가 말한다. “내가 하늘의 별만큼 빛나는 꽃을 피울 수 있어.” 강아지 똥더러 거름이 되어 자기 안에 “스며들어라” 라고 권한다. 타자에게 스며서 자신의 존재를 들여보내줘라. 꽃 한송이 안에 우주가 담기는 것에는 똥이 다른 존재의 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똥굿이다.
“카락 카락 탁탁 튀는 낱개들 몸살들 쏟아지는
내장들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잠 속의 항문 마이크 물면
(…)
누가 나 좀 말려봐요 쟤 좀 건져줘요
저년 싸겠네 저거 꿈꾸다 구체적으로 웃는 거 봐
굿이라도 해야겠지 똥병이지 저거
거기 똥신이시어
차라리 나 타인 되게 하시오 이 몸 작살에 올릴 테니
제대로 썰어 다시는 붙지 않게 멀리멀리 뿌리시오
워이 똥물 워이 똥 튄다”
(장수진, 시 <똥굿>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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