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균 개인전 <꽃밭의 역사>
○ 전 시 명: 박영균 개인전 <꽃밭의 역사>
○ 전시기간: 2020.4.29(수)~5.31(일)
○ 전시장소: 자하미술관
○ 참여작가: 박영균
○ 오프닝: 5.13(수)
30년전 젊은 박영균을 알았다면 그를 처절한 민주항쟁의 현장에서 투쟁한 예술가로 소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19년에 만난 박영균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맡겨진 소명을 다하며 살아온 여느 예술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느릿느릿한 말투와 움직임, 적절한 표현을 찾아 머뭇거리는 작가의 모습에서 1980년대 학생운동의 긴장감이나 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상처도 흐려졌지만 젊은 날의 뜨거운 기운과 에너지는 그의 작품에 오롯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그리기는 대상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오래된 활동이다. 인간의 몸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과정은 노동집약적이고 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에 오늘날 기술문명 시대에는 진부한 매체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눈을 통해 수백,수천번 반복하여 관찰되고, 예술가의 손을 통해 시각화된 대상은 마치 피부에 아로 새긴 문신처럼 그의 몸과 캔버스에 각인된다. 30여년이 훌쩍 지난날에도 박영균의 작품 속 사건들이 여전히날카로운 바늘처럼 생생하고 고통스러운 이유이다. 작가는 "분하다", "아프다", "창피하다", "속상하다"며 작품을 1인칭의 시점에서 현재화하여 설명한다.
박영균 작업의 중심 주제는 1980년대를 관통하는 민주항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나 기실 그의 작업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근간으로 한다. 동학운동, 민주항쟁부터 위안부 문제와 해고노동자 문제, 환경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이 아우르는 다양한 소재들은 우리 역사의 비극과 그 희생자들, 고통 받고 소외당한 우리시대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반영한다. 잊지 않으려 그림을 그렸다는 그의 작품은 지금은 사계절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꽃밭이지만 그 꽃밭으로 가려진 지난 사건과 아픔을 기억하고 그 미래를 추적한다.
박영균의 열 세번째 개인전 『꽃밭의 역사』는 크게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그 중 하나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가의 자화상 연작으로 미술대학에 입학한 1986년부터 2020년에 이르기까지 민주항쟁과 학생운동 등 투쟁의 현장과 삶의 현실을 가로지르며 살아온 예술가 개인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와 함께 한때 북한의 조선화에 매료되어 그린 일련의 민주항쟁 역사화 여러 점도 한 켠에 소개되는데 이 역시 이번 전시에서 첫 선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마지막으로 제주 강정마을의 풍경을 그린 최신작 「꽃밭의 역사-강정에서」를 위시한2000년 즈음부터 발표된 대표작들이 전시된다.
자화상은 예술가들의 단골 소재다. 작품의 소재를 찾아야하는 과제를 떠안은 예술가에게 자신의 얼굴만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도 없을 것이다. 지난 30여년간 작가는 꾸준히 자신의 얼굴을 그려왔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 분노와 울분으로 거리에서 투쟁하던 젊은 예술가는 작고 허름한 작업실로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굳게 입을 다물고 표정 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젊은 예술가의 결연한 모습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사실적인 묘사에서 자유로워진다. 1986년 자화상에서 2014년 양손에 촛불과 붓을 든 「노란 선이 보이는 자화상」, 그리고 2020년 4월에 그려진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화상 연작에는 세상과 작업실이라는 양 갈래 길을 오가며 엮어낸 우리 사회와 개인의 역사가 펼쳐진다.
박영균은 1990년대 초에 그린 몇 점의 사실주의 회화를 '짝퉁 조선화' 풍이라며 농담처럼 말한다. 1989년 대학생 임수경의 방북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처음 접한 뒤 조선화의 민족주의적 동양화풍 형식에 매료되어 그린 일종의 역사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활동에 함께 참여했던 실제인물들을 무대 위에 배치하고 사건을 극적으로 구성한 일련의 작품은 전형적인 역사화의 형식을 보여주지만 작가는 무자비하게 린치를 가한 경찰관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유치장에서 파병반대」를 그렸고, 짧은 치마를 입고 시위를 돕는 여대생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강경대 장례식 날 이대 앞에서」를 그렸다. 벽보를 부착하는 동료들을 위해 망을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벽보선전전」등 이 일련의 작품에는 작가와 동료들, 그들이 처했던 현실이 여과 없이 등장한다. 작품 속 순간은 비록 사적인 일화였지만 예술가의 작품으로 기록되면서 극화된 형식 자체도역사적 기록이 된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젊은 날의 열정도 희미해졌다. 세상도 그만큼 많이 변했다. 경찰들의 눈을 피해 거리에 벽보를 붙이던 공포의 시간도 지나갔고 작가는 이제 작업실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1997년 작품 「86학번 김대리」로부터 2020년 「꽃밭의 역사-강정에서」에 이르는 시간을 거쳐 오면서 박영균의 작품이 주제나 형식에서 자유로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작이나 끝을 정하지 않은 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화면 위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된다. 노동자이든 학생이든, 또는 정치가이든 예술가이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간과하거나 묵과할 수 없는 이웃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작업실로 흘러 들어오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 사회의 파수꾼을 자처하며 작업실 벽 모서리에 몸을 숨기고 곁눈질로 망을 보는 예술가의 모습은 예술과 사회라는 간극 사이에서활동해온 박영균의 지난 30여년의 시간을 잘 보여준다.
『꽃밭의 역사』라는 전시 제목은 2013년 광화문의 보도 위에 급조된 꽃밭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와 농성장을 철거한 자리에 노동자들의 희생과 투쟁을 가리고 지우기 위한 정치적인 도구로 꽃밭이 이용되었다. 올해 해고노동자들은 복직에 성공했지만 꽃밭이 가린 역사와 현재, 나아가 미래를 잊지 않는 것이야 말로 우리 시대가 지켜야 하는 희생자들에 대해 갖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전시 『꽃밭의 역사』는 지금의 꽃밭이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수많은 살풍경의 이야기들을 몸소 겪으며 망각의 물결을 거슬러 복기해온 한 예술가의 발걸음을 함께 따라가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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