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S
정세라 개인전
《모호한 대답》
2024.4.2 - 4.23
자하미술관
자하미술관에서 4월 2일부터 4월 23일까지 정세라의 개인전 <모호한 대답>을 개최한다.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정세라 작가는 일상적 시공간을 몽환적으로 변환하여 침잠하는 내면 세계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묘한 심상(心像)은 캔버스 위에서 산란하는 빛을 통해 일그러지고 일렁이며 번지는 가운데 거울과 석고상, 밤의 도시, 수족관과 해파리, 통로, 유리 등과 같은 모티브로 다양하게 구현되곤 하였다. 이러한 연장선 위에 있는 이번 전시에서도 도시 근교의 빈집, 철 지난 해변, 외딴길에서 마주친 반사경 등의 새로운 모티브가 등장한다.
전시 <모호한 대답>은 길들여진 하루 일과 속에서 상상계(想像界)에 대한 흥미와 열망을 잃어가던 작가에게 영감을 준 '사소하고 어렴풋한 이미지' 들을 기록하고 있다. 고독한 산책자가 포착한 순간은 우두커니 쓸쓸함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얼핏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재현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꿈처럼 뒤엉켜있는 빛들 사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부재가 현실을 초월한 저 너머의 세계로 감상자를 이끈다.
화면을 지배하는 초현실적 분위기는 자하미술관 또한 관통한다. 도시 소음이 아득한 고지에 위치한 미술관의 시공간도 우뚝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듯하다. 이 세계도 사람보다 꽃과 나무, 사물들이 가득하다. 인공의 빛 대신 천연의 빛이 찬란하다. 평소였다면 무심코 스쳐 지나갔을 모든 것이 꽃처럼 피어난다.
정세라 작가와 자하미술관이 공명하는 다중 세계에서 현실 속 고민을 내려놓고 내면에 온전히 몰두하는 경험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
연약한 세계의 밤
김노암(문화역284예술감독)
1
마음의 심연 처럼 빛과 어둠, 사물들로 가득한 세계의 심연은 우리의 의식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일상의 시간을 영원성의 감각으로 변화시킨다. 화가의 이미지가 그것을 잠시 구현해낸다. 어떤 경계와 한계를 벗어나는 순간을 경험한다. 오래전 전설적인 의사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했다지만 어떤 예술가는 그 반대로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고도 했다. 무언가 심오한 성찰을 담은 표현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다 이해하기에 한 인간의 일생은 참으로 짧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그 영혼의 내면을 이해하기란 요원하다. 그렇게 시간은 언제나 촉박하다. 예술과 인생을 비교해보는 것은 예술가와 예술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시대마다의 감각을 반영한다. 시계 소리는 모두가 잠든 시간, 더 소란스럽다. 시간은 우리의 안과 밖에서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다르게 째각거린다.
정세라 작가의 작품속 사람들이 사라진 밤과 낮의 시간을 담고 있다. 혼자 바라보는 그 세계는 기묘한 매력을 뿜고 있다. 이미지는 기계론적이거나 생리학적인 세계관의 밖을 산책하는 자들의 세계이다. 신비한 밤이다. 골목길, 공원, 도로변의 한적한 가로등 불빛은 우리의 상상을 펼치게 한다. 퇴색한 도회지의 오래된 전기불빛은 그런 신비를 낳는다. 하나의 의식이 분열하며 둘, 셋, 넷 계속해서 분화되어 간다. 일상의 배후 또는 일상이 배경으로 물러서며 흐릿해지고 세계와의 관계가 모두 바뀌어 버리는 감각들로 채워진다.
'Stars' 시리즈와 '떠오르는 빛'은 도시의 야경이 마치 은하계의 별들이 내려앉은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다. 불빛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야경은 우리의 눈에 아름답고 신비하다. 그리고 우주의 어둠을 밝힌다. 작가의 '같거나 다른'시리즈, '붉은 실내' 등은 자연의 빛과 인공의 빛이 병치된다. 빛의 속성은 그것이 자연적이건 인위적이건 동일하다. 공원의 풀과 나무에게는 말이다. 인류에게도 그렇다. 빛은 아주 가까이 그러나 너무도 멀리 빛난다. 시공을 초월하는 신비를 품고 있다. '그날의 사건사고', '모호한 흔적', '다가오다' 등은 기이하지만 동시에 익숙한 초현실적 시간을 은유하는 이미지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 시리즈와 '그림자의 무늬', '꾸지 않은 꿈' 등은 사건의 전 또는 그 후의 모든 것이 정적에 싸인 순간을, '숲의 입구', '가라앉는 밤', '여전히 그곳엔 아무도 없으므로' 등은 고독한 산책자의 눈에 비친 공원의 야경을 통해 깊이 가라앉는 마음의 상태, 내면의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지난,여름' 시리즈만이 밤이 아닌 낮의 해변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밤이건 낮이건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전형적인 해변의 풍경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미세하지만 어딘가 금이간 세계의 균열을 떠올리게 한다. '조용한 폭발'은 해변의 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 세계가 박제화되어버린다. 폭발은 결코 조용할 수 없다. 그러나 소리없는 폭발의 이러한 역설은 일상과 상식의 이면세계를 노출한다.
빛과 에테르. 빛은 물리적 빛이 아닌 심미적 빛이다. 절대 고독의 순간 빛이 찾아오고 빛이 물러난다. 세계의 경계가 서로 침투하며 흐릿해진다. 물 속에서 퍼져나가고 중첩되는 음파처럼, 세계가 빛을 만나 액체가 된다. 빛의 액체의 특성이 세계를 집어삼킨다. 평범한 도시의 일상이 기이한 빛의 파장과 운동, 사물들의 변화와 변성이 유기체처럼 확산된다. 거대한 눈덩이가 도시의 일상 뒤에 자리하고 있는 초현실적 힘, 비현실적 만남을 만들어낸다. 세계와 사물이 맞물려 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끼어있다.
이미지는 빛으로 단련된 형상들이다. 하나이며 동시에 모두인 빛은 형이상학적 미학의 화두이자 결정판이다. 화가는 유동하는 빛을 고정시킨다. 그 빛은 신비의 현현이며 상징이다. 빛은 사람들을 오랫동안 당혹시켰다. 물리적 현상이면서도 동시에 비물질적이며 정신적이다. 빛은 여러방식으로 인류에게 세계와 우주에 대한 겸허한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타자가 주체를 낳는 존재의 빛이라면 예술은 빛의 일종이다. 예술은 인식의 대상을 넘어서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에 예술을 완전히 이해한다거나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영원히 타자로 남는다. 이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예술이 종료되어버린 이후의 시간을 인류는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세라 작가의 시간은 빛과 어둠 사이를 왕복한다.
2
모두가 잠든 시간. 고독한 산책자가 있다. 도시, 세계는 숨겨두었던 얼굴을 잠시 드러낸다. 비밀의 봉인이 잠시 풀리는 것처럼. 약간 흐릿한 포커스들이 뒤엉킨다. 사물들이 하나의 차원이 아닌 여러 차원의 겹침을 통해 상호 침투하거나 배척하며 기이한 풍경을 보여준다. 뭔가 격렬한 사건사고가 일어났거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경험했던 황홀하지만 불안했던 낯선 현대의 불빛. 도시를 홀로 산책하는 자가 만난 세계. 그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러한 경험은 오로지 자유로운 정신과 감각을 지닌 개별자, 고독한 단독자의 경험이다. 그의 경험을 우리는 막연한 느낌과 뉘앙스로만 감지할 수 있다. 거꾸로 그러한 경험을 통해 단독자이자 개별자로서의 개인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고립된 개인적 취향의 예술에 빠져있다하더라도 개인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개인과 세계가 결합하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 그때 인간의 한계를 잠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경험, 시간이 부리는 마법과 신비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체험한다. 시간의 독특한 체험은 인류를 집단으로부터 이탈해 개인으로 느끼고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개인의 탄생이란 현대적 시간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인이자 개인으로서 화가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시선을 담아 그 경험을 이미지로 그려낸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작가는 서 있다. 예기치 않은 순간 나타나자 마자 사라져버리는 사건처럼, 첫눈에 반해버린 사랑처럼, 빛과 이미지, 음영의 순간을 포착한 그림에서 우리는 순간적인 어떤 예감 또는 뭔가 의미있는 사건의 찰나를 경험한다. 정세라 작가의 이미지는 빛의 발산과 동시에 주변과 융합하는 시간이 담겨 있다. 강물에 잉크를 떨어뜨렸을 때 검은 빛은 강물의 유동하는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 버린다. 빛이 액체성을 지니게 된다. 형태가 결정되지 않은 어떤 이미지의 덩어리가 응축하고 확산하고 미끄러지고 비스듬히 뒤섞인다. 결정과 비결정의 운동이 퍼져나가며 시간의 차원이 결합하고 분해된다. 미세하게 진동하며 반복된다.
오랫동안 정세라 작가는 도시인의 불안함과 욕망을 빛의 이미지를 빌어 개성적인 심리적 풍경을 표현해 왔다. 도시인이란 근대인이자 현대인을 아우른다. 방금까지 내 옆에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가에게 내면의 불안은 결코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계기이다. 내면의 불안이 투영된 풍경이지만 동시에 더 깊이 침잠하는 마음의 크기가 느껴지는 이미지들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이전보다 좀 더 성찰적이면서도 극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